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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2 12:34

모라비안(Morav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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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신교 선교의 여명
2. 모라비안(Moravian)운동에 대한 고찰
2-1. 모라비아와 그 선교역사
2-2. 핍박과 디아스포라
2-3. 모라비안의 재기
2-4.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
3. 진젠도르프 백작
4. 결 론




콘스탄티노플에서 예배에 사용되는 언어와 성경의 모국어(母國語)는 라틴어가 아니라 헬라어이다. 서방교회인 로마 가톨릭에 비하여 추상적인 신학에 관심이 많았고 실천적인 적용에 비교적 관심이 적었으며, 선교적 정복은 더욱 적었다. 소위 주교(主敎)라고 하는 동방 교회의 총수(總首)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에 의해 통제를 받았고, 여기서 황제는 동방교회의 총수요, 교황은 서방 교회의 총수였다. 동방 교회와 연관되어 성장한 문명은 소위 비쟌틴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틴 황제가 자기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명한 그 도시의 원래 명칭이 비쟌티움(Byzantium)이었기 때문이다.


1. 개신교 선교의 여명

16세기 카톨릭 교회는 반동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일으켜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했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못하였다.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적극적인 정치적, 군사적, 교리적 공세를 막아내고 유럽에서의 발판을 마련하기에 급급했을 따름이며 또 해외선교에 헌신하려는 인물도, 이를 시도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해외 식민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로마 카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해외선교의 기회를 갖기도 어려웠고 안전한 여행을 하기도 힘들었다. 일찍이 개신교가 강하게 세력을 구축했던 독일이나 스위스는 육지에 둘러싸여 있어서 해외선교를 위한 식민지를 제공해 주지 못하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의 수도원이나 수도사 선교회들처럼 해외선교를 추진할 만한 강력한 선교단체나 기구도 없는 형편이었다.

개신교의 신학적 이론 역시 해외 선교에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 마틴 루터는 회개의 절박성만을 강조하였을 뿐 해외선교의 중요성은 간과하였다. 심지어 지상명령에 대한 책임은 신약시대의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그들이 알고 있던 모든 세계에 이미 복음을 다 전하였으니 후세대인 우리에겐 지상명령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까지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칼빈(Calvin)의 신학노선 역시 이와 비슷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의 교리에 의하여 하나님께 구원 받을 사람은 미리 예정해 놓으셨으므로 구태여 선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칼빈 자신만은 그 당시 개혁자들 중에서 선교의식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칼빈은 수십 명의 복음 전파자들을 조국인 프랑스로 보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위그노파(Huguenots)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브라질의 인디안들을 위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555년에 시작했던 그 선교사업은 빌레가뇽(Villegagnon)의 배교로 어이없이 끝이 났다. 빌레가뇽이 배반하여 포르투갈인에게 도망하자 그들 구교도들은 갓 도착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하려던 선교팀을 약탈하였으며, 방어할 능력도 없이 살아남은 몇 사람은 예수회 신부들의 손에 의해 학살되었다.

17세기에 이르자 개신교의 선교활동은 상당히 활기를 띠게 되었으나 미국 식민지에서의 선교사역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퀘이커 교도들이 한때 잠깐이나마 선교의 사역을 하였다. 1661년 죠지 폭스(George Fox, 퀘이커를 창설한 사람)가 3명의 선교사를 중국으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중국에 도착하지 못했다. 몇 년 후에는 첫 번째의 루터교 선교사인 유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on Weltz)가 남아메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수리남(Surinam)에 파송되어 사역하였으나 그것 역시 실패작으로 끝나고 말았다.

개신교의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때에야 많은 개신교도들은 복음이 없는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그들의 중대한 의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을 한 첫 번째 그룹은 루터교의 경건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는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 Jacob Spener)와 형식적인 국교회에서 돌아선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등 이었다. 할레 대학의 교수였던 프랑케는 이 대학을 유럽의 경건주의와 복음운동, 18세기의 해외선교 운동의 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해외선교란 18세기에도 역시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에게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으며 자연히 그들은 웃음거리와 놀림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들은 경건주의자들을 '광신자', '바알의 사제들', '이단자들', '잘못된 루터교인', '위험한 사람들' 등으로 몰아붙였으나, 경건주의자들은 확신을 가지고 선교사업을 꾸준히 계속해 나갔다.

선교의 서곡은 그 자신이 경건주의자이기도 한 덴마크의 페르디난드 4세의 요청에서 시작되었다. 왕은 덴마크의 식민지인 인도의 남쪽끝에 위치한 트랜퀴바(tranquebar)를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할레대학에 부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돌로매 지겐발크(Bartholomew Ziegenbalg)와 헨리 플뤼챠우(Henry Plutschau)가 자원하여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10년 후인 1741년 코펜하겐에 선교사 후보자를 위한 선교사 대학을 설립하였는데 1722년 그리인란드(Greenland)에서 훌륭한 선교의 업적을 이루었던 한스 에게드(Hans Egede)도 그 학교 출신이었다.

덴마크-할레 선교회 출신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중의 한 명은 크리스챤 프레데릭 슈바르츠(Christian Frederic Schwartz)이다. 그는 헌신적인 루터교인으로서 1750년 인도로 파송되어 그후 임종할 때까지 48년간 그곳에서 성실하게 선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주로 인도의 해안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였는데 여러가지 말과 방언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는 독신으로서 자식도 없었으나 입양해 기른 자식들이 믿음 안에서 탄조레(Tanjore)에 있는 교회가 2,000명 정도의 교인으로 부흥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생전에 덴마크-할레 선교회는 할레대학 출신의 선교사만도 60여명이 넘는 큰 성장을 이룩하였으나 초기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은 퇴색되어 갔다. 그의 사후 몇 안 되는 선교 지원자들만이 빈 자리를 메울 뿐이었다.

다행히 덴마크-할레 선교회의 쇠퇴가 초기 개신교 선교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할레대학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또 한 그룹이 선교일선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선교사역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진젠도르프 백작의 주도하에 일어난 모라비아 형제회(The Morarian Brethren ; Unitas Fratrum)는 지상명령의 비젼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 아니라 현대선교의 위대한 시대(19세기)가 도래하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18세기 동안만도 모라비안들은 버진 제도(Virgin Islands, 1732), 그리인란드(Greenland, 1733), 북아메리카(1734), 라플랜드(Lapland)와 남아메리카(1735), 남아프리카(1736), 라브라도(Labrador, 1771) 등에 선교기지(Mission Station)들을 구축하였다. 모라비아 교도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평신도들의 선교사에 대한 비율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1:60의 비율, 즉 60명의 교인 중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으로 개신교의 전체 비율이 1:5,000인 것을 생각하면 정말 엄청난 것이 아일 수 없다. 모라비안들이 이렇게 높은 비율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선교사들에게 자급선교(Self-Supporting)를 권장했다는데 있다.


2. 모라비안(Moravian)운동에 대한 고찰

모라비안(Moravian)운동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잘 알려진 운동이다. 상식으로 아는 바로는 그들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라는 점과, 현대 선교운동의 최초의 전주라는 점과, 교회연합을 강조하였다는 점등 이다. 특히 그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의 신앙과 열심, 그리고 헌신은 크리스챤 지도자의 훌륭한 모델로서 비쳐지고 있다. 그 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의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그 운동의 그러한 점을 가리켜 '유럽선교에 활력있는 누룩'이라 하였고, 비숍 하세(Bishop Hasse)는 말하기를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의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이처럼 평가되고 있는 이 운동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


2-1. 모라비아와 그 선교역사

비쟌틴 제국이 르네상스를 지내던 10세기 동안에 동방교회는 비기독교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민족은 슬라브족이었으며, 그들에게 처음으로 파송된 선교사는 콘스탄틴과 메도디우스(Methodius)였다.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한 사람은 화가인 이 형제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에 의해 모라비아의 황태자인(모라비아는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한 행정구역에 속하는 곳이다) 라티스라브(Ratislav)의 요청을 받고 모라비아로 파송되었다. ...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 요청은 처녀지역에 기독교 신앙을 확대시키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훈련에 의해 선생이 된 콘스탄틴은 복음서와 기도문을 작성하고 번역하는 언어 정리 작업을 함으로써 슬라브 문화의 기초를 놓았다. 예배에서 지방어를 사용하게 되어, 로마는 정죄하여도 콘스탄티노플에 의해서는 더 격려를 받아, 결국 19세기와 20세기의 근대 선교 사업의 융성을 가져온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고 하나의 전초 작업이 된 것이다.

로마의 교황은 그들의 사업을 자기 관할 하에 두려고 시도하였다. 콘스탄틴은 로마를 두 차례 방문하였고 896년에 사망하였다. 혼자 북쪽으로 돌아와 메도디우스는 성경 전서를 슬라브족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하였다. 그 기간 중에 그는 교황과 접촉을 계속하였으며 처음에는 지방어 사용을 정죄하더니 나중에는 허용하게 되었다. 설상 가상으로 독일 성직자는 그를 교회 영역이라고 하는 것에 침입자라고 간주하여 비쟌틴 선교와 슬라브 문학에 무자비하리만큼 반대하였다. 한때 그들은 메도디우스를 스와비아(Swabia)의 한 수도원에서 3년이나 감금한 적도 있었다. 885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라비아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대단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모라비아에서 축출되어 그의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불가리아로 갔는데, 그 곳 상황은 토착 기독교 문화발전에 보다 긍정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1029년에 하나의 주였던 그곳(모라비아)이 보헤미아에 즉, 독일황제의 깃발 아래 병합되었다.

15세기 초 로마교회가 보헤미아교회를 병합하려 하였을 때 거기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지도자 요한 후스(John Huss)의 활동에 의한 영향과 지도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413년 드디어 순교를 당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두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그 하나는 온건파였는데, 1437년 보헤미아 국가교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강경파였는데, 쿤발드(Kunwald)에서 처음에는 신약단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었다가 1457년에 그것을 '형제의 교회'(the Church of the Brotherhood)라고 개칭하였다. 그것은 완델파와 같은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포함시켜 다시 '형제의 연합'(Unitas Fratrum)이라는 것으로 되어었다. 그들은 퓨리탄(청교도)처럼 엄격한 교리와 훈련, 예배의 개혁 그리고 형제애들을 강조함이 그 특색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적인 신앙에로 돌아가는 운동에 역점을 두었는데, 그들의 초기 지도자들은 완델파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그것으로써 그들은 사도직의 계승을 주장하였다. 성경을 강조하는 믿음과 평화주의의 표방이 그들 신앙의 특색이었다. 로마교회가 그들로부터 분리된 이 그룹들을 잘 볼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교회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2-2. 핍박과 디아스포라

1609년 보헤미아 황제 루돌프(Rudolph)는 형제 연합단에게 자유를 인정하는 서한을 주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신교회 중 반 이상이 그들에게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누린 평화와 번영의 시기도 잠깐이었다. 그 황제의 죽음 후 로마교회는 트랜트(Trent)대회의 결의들을 가지고 그들에게 압박을 가해왔다. 그들은 맹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보헤미아는 그들의 새 황제에 대항하여 30년간 전쟁을 벌였는데, 1620년 바이센버그에서 대패하였다. 그들 중 3600명이나 되는 가족이 피난의 길을 떠났고, 그들은 유럽 여러지역에 흩어졌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을 포기하였지만 남은 자들이 또한 있었다. 유럽 여러 지역에 흩어진 그들의 단체에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가 지도자로 그들을 돌보았다.


2-3. 모라비안의 재기

모라비안이 그같이 추방에 의하여 흩어진 후, 즉 흑암의 때에도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기도는 놀라운 방법에 의하여 응답을 받았다. 1715년 부흥의 불길이 보헤미아의 풀네크(Fulneck)와 리티즈(Lititz)에서 붙게 되었다. 그 때 지도자는 크리스챤 데이비드(Christian David)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로마 카톨릭으로 부터 개종하여 삭소니(Saxony)에 정착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를 중심한 모라비안들은 그 당시 중요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백작 진젠도르프(Count Nicolas Zizendorf)를 그들의 단체에 영입하였다. 그는 본래 루터교회의 교인었고, 그의 아버지는 삭소니 정부의 한 장관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경건파에 속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일찌기 경건주의의 영향을 부모를 통하여 받았던 분이었다. 그는 프랑케(Franke)가 경영하는 귀족들을 위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법을 연구하여 1721-1727년까지 드레스덴(Dresden)에서 법정변호사로서 그리고 상담자로서 일하였다. 그는 여가에는 기독교인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침 그들 모라비아인들이 그를 통하여 그의 부동산을 얻게 되었고, 거기에 그들의 본부를 짓게 되었다. 그 땅은 벧센돌프(Berthelsdorf)에 있었는데, 거기에 그는 모라비안과 접촉하기 이전에 교구목사 안드류 롯(Andrew Roth)이라는 목사를 초빙하여 목회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 땅을 모라비안 본부 설립을 위한 기지로 얻은 것은 그들이 박해로 말미암아 이산된 후 다시 기독교의 단체로서의 새 출발이라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들의 부흥의 지도자 크리스챤 데이비드(Christian David)는 기공식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제 거처를 찾는다'는 시편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 때가 1722년 6월 17일 이었다. 그들은 헤른후트(Herrnhut) 즉 '주의 지키심'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곳은 흩어진 형제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쿤발트 가까이 자우헨달(Zauchenthal)로 부터 온 다섯 개의 고대교회의 자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하였다. 진젠도르프가 그런 것처럼 경건파의 자손들이 그 운동에 가담하였고, 경건파의 삶들이 또한 영입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들의 영적인 중심지로서 뿐 아니라, 산업과 무역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얻은 이익은 바로 선교사업에 사용되었다. 그곳이 자연적으로 선교운동의 기지가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루터교회의 교인으로 루터교회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루터교회의 예배에 함께하였고, 루터교회는 진젠도르프가 이끄는 형제단을 교회 내의 특수한 단체로 인정하고 허락하였다. 1727년 8월 12일 모라비안 형제단의 그런 독특한 입장을 내용으로 한 헌장, 훈령, 금지조항을 내포하는 법칙들이 헤른후트의 단체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그들의 단체는 베셀돌프 교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다음날 그들이 가진 성례식에 오순절적인 성령의 체험을 가졌었다. 성령의 불이 그들 위에 임하여 놀라움과 사랑의 충만함과 찬양으로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 목격자는 전하였다. 진젠도르프는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모라비안에로 연합해서 그 단체의 성격이 규정되어지게 되었다. 그는 이미 다섯 살 때 '자기를 위하여 생을 준 분을 위하여 살고, 다른 사람을 예수에게 인도하는 것'을 결심하였다. 그가 윗덴벨그에서 공부하던시절 기독인의 단체라는 것을 조직하였는데, 복음을 전하여 세계를 변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다시 '겨자씨의 제도'(Order fo the Mustard Seed)라는 단체로 개명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가 드레스덴에서 법원에 상담역으로 있을 때, 매 주일 오후 공중집회를 가졌었는데, 거기에 모인 기독인들에게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는 벧셀돌프에서 매일저녁 묵상을 하였고, 주일 날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하였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을 포함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네 형제의 동맹(Alliance of the Four Brothers)'이라는 단체를 구성하였다. 두 사람은 목사였고, 한 사람은 젊은 친구였다. 그룹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서신으로, 책을 분배함으로, 개인접촉으로 추진되었다. 그의 유명한 말은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이다'(I have only one passion, and that is Christ)는 말이다. 그는 '기독인의 우의(友誼)외에 기독교를 알지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 받은 바의 축복을 나누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호혜적인 활동을 보이게끔 함이 그의 운동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들 회원들은 모두 방문을 통하여 우의를 서로 나누는데 힘썼다. 모라비안의 단체는 그들을 이끄는 두 가지 철학을 두고 있었다. 하나는 회원들이 단처럼 하나의 묶음이 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전투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환언하면, 그의 지도이념은 모든 단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는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끔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선교사업을 실천하였는데, 1732년 암스텔담에서 활약하였고, 그 후 24년간 유럽, 미국을 통하여 선교사업을 지휘하였다. 말기에 그는 발틱의 국가들 가운데 한 달 동안 설교하였다. 즉 에스토니안 가운데 부흥의 분위기를 고취하였다. 1738년에는 베를린의 한 창고에서 집회를 하였는데 성황을 이루었고, 1941년에는 제네바에서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미쳤다.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그는 성직자와 교인간의 장벽의 담을 헐어버림과 평신도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제도적인 교회를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영향을 강화하였고, 교회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2-4.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

헤른후트에서 일어난 놀라운 오순절적 성령 체험이 영국에서도 일어나기를 진젠도르프와 그의 동료들을 원하였다. 부흥의 사절이라 할 수 있는 요한 텔츠만(Johann Toltschmann)과 다른 두 사람이 진젤돌프의 서한을 지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 편지는 헤른 후트의 경험을 알리는 내용이었는데, 옥스포드대학 '기독교 지식 촉진회'(the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와 죠지Ⅰ세의 궁정목사에게와 리프(Schoumberg Lippe)라는 왕후를 시중드는 백작의 직책을 가진 여성도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 편지에 대한 백작의 반응은 적극적이었던 반면, 그 궁정목사는 유보적인 반응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임금에게도 옥스포드대학에도 잘 전달되지 못하였다. 진젠도르프의 첫번째 시도는 그 처럼 결과를 낳지 못하였지만, 그의 노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735년 봅 틸칙(Toltschig)의 인솔로 모라비아 선교사들이 미국 죠지아로 가던 도중 영국 런던에 도착하였다. 그들에 앞서 선교사로 미국에 건너간 그들 그룹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나 대학의 교수였던 슈판겐버그(Spangenberg)교수였다. 훗날 모라비안의 단체의 감독이 되었다. 그에 대하여 이런 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슈방켈펠드(Schwenckfeldters)의 재침례파 그룹이 추방을 받아 할 수 없이 삭소니 지역을 떠나 죠지아 주로 그들의 거주지를 바꾸려 하였다. 그들은 먼저 홀랜드에 도착하였는데, 미국의 이주지를 죠지아가 아닌 펜실베니아 정착지에 대한 계획을 수정하였다. 슈판겐버그는 바로 그들의 지도자였는데, 그는 진첸돌프의 오그네돌프의 허가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슈판겐버그는 진젠도르프의 그룹의 대표로 이제는 미국 죠지아주에 모라비안의 식민지 건립을 위해 오그너 돌프(Oglethorpe) 총독의 인가를 얻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오그네돌프는 그들의 교리와 입장을 심사한 후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슈판겐버그는 다른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함께 1735년 2월 영국을 떠나 사바나 가까이에 도착하여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것은 헤른후트의 모형을 따라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슈판겐버그와 그의 그룹은 그곳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거주하는 인디안족 크릭(Creek)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상의 두 차례의 모라비안의 영국과의 관계는 미미한 것이었으나, 모라비안 부흥과 선교진출에 계기가 되었다.

죠지아에서의 그들의 활동은 좋은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더 많은 선교사들을 거기에로 파송하게끔 결정하였다. 1737년 8월, 26명이 헤른후트를 떠나 런던을 통과하게 되었다. 그것은 거기에서 선편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몬드(Simmonds)라는 선편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었다. 그 배에는 미국으로 가는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도 동승을 하였는데, 그것은 18세기 영국 부흥운동을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배에는 영국인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과 찰스 델라모트(Charles Delamotte)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후에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우연한 만님인 것 같은 사건을 통하여 사람들을 선택된 축복의 도구로 삼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웨슬레가 그 후 모라비안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그의 부흥운동에 연결되는 것으로 고려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3개월이란 긴 항해를 통하여 영적으로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였다. 잉함 목사는 후에 미국에 돌아와서 형제단의 능력있는 전도자가되어 활약하였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의 시작은 제임스 허톤(James Hutton)이라는 매서인(賣書人)과 연관이 있다. 그는 또한 요한 웨슬레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사란이었다. 웨슬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후톤의 주선으로 그의 부친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는 요한 웨슬레 일행의 미국행 전송을 위하여 시몬드선(船)에 왔다가 거기서 모라비안의 일행을 만났다. 그때 거기서 그들을 만남이 영국에 있어서 모라비아 교회의 첫 교인이 되게 한 것이었다. 그는 그후 웨슬리와도 계속 연락과 접촉을 하였다. 특히 모라비안의 인디안의 선교에 대한 소식에 큰 감동을 받았고 성경공부와 기도에 열중하는 작은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그 단체를 명명하여 '평신도 단체'(Vestry Society)라 하였다. 거기에는 성이 있는 기성교회 교인들인 회원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웨슬레를 후원하였는데, 그에게로부터 전하여 온 편지를 읽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허톤의 단체는 후에 '페테 골목의 단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허톤의 이 단체 이외에도 독일에서 추방받아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비슷한 단체들이 생기게 되었다.

1737년 진젠도르프의 동료와 함께 영국 방문의 직접적인 이유는 미국의 식민지 지역의 일에 관하여 영국의 관리국과 의논하기 위하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를 안드류 도버(Andrew Dober)로 부터 받고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들의 런던 내방의 다른 하나의 목적은 영국에 있는 모라비안 형제들을 격려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인 거주자들의 가정 중심으로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는 켄트버리 대 감독과 챨스 웨슬레를 만났고, 그의 '겨자씨 회'(Order of the mustard Seed)에 대 주교와 감독 윌손을 영입하였다. '페테골목의 단체'와 그의 일을 돕는 10인의 젊은 사람들의 한 그룹을 발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런던 체류기간 동안 안드류 오스트램(Adrew Ostroem)과 요한 프레디렉 이틴즈(Frederick Itintz)를 지도자로 최초의 교회를 영국에서 조직하였다.

영국에서 모라비안 운동의 발전과 밀접히 관계되는 또 한 사람은 피터 보러(Peter Bohler)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나대학에서 갑작스런 회심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 후 헤른후트의 모라비안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진젠도르프에 의하여 남 케로나이에 파송할 선교사로 내정되었고, 그 선교지로 가는 도중에 영국에 들러 선편을 기다리면서 머물게 되었다. 테일러 하밀턴(Taylor Hamilton)은 말하기를, 그의 영국 도착은 영국 교회에 모라비안의 결정적 영향을 가져다 준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 때 마침 죠지아에서 되돌아온 웨슬레와 해후하게 되었다. 맥이 빠지고 기진이 쇠하여진 웨슬레와 만난것은 독일 사람의 집에서 였다. 웨슬레는 톨칙(Toltschng)의 편지를 지참하고 왔었다. 그들의 만남은 훗날 부흥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모라비안은 웨슬레에게 영향을 주었고, 요한 웨슬레는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 설립에 거꾸로 영향을 주었다. 뵐레의 런던 체류기간 동안 그는 후톤이 이끄는 단체들과 독일 거류민들의 신앙 단체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였다. 그 당시 영국에서는 페라기안주의에 의한 팽배한 도덕주의 때문에 무척 사람들은 굳어져 있었는데, 그의 설교는 크게 환영을 받았고,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지게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기 4일 전에 웨슬레를 만났고 '페터골목의 단체'의 미래발전을 모색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후톤의 앨글리칸과 휫필더의 회심자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 단체는 뵐러와 메도디스트 형제들에 의하여 그렇게 인정받은 단체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영국에서 모라비안 교회의 출발로 보기도 한다. 그들은 영국교회의 교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주 중의 날에 모여서 고백과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각각 지도자를 선정하고, 정기적인 금식과 '사랑의 잔치'(Love Feast)를 가졌으며, 선교에 힘썼다. 그들은 단체의 질서를 존중하였고, 단체를 이탈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즉 모든 형제의 결정된 사항을 존중하였다. 뵐러가 드디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 웨슬레는 그 단체의 감독과 설교를 맡았다. 후톤은 진젠도르프에게 구하기를, 뵐러가 돌아와 그들의 감독직을 맡게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페터골목의 사랑의 잔치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웨슬레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아침 3시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땅에 엎드리어 주의 같이 하심과 기쁨을 체험하였다. 그들은 감격과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고, 하나님의 찬양과 주님을 주(主)로 시인하는 소리를 발하였다고 한다. 그때의 오순절적인 체험은 모라비안의 각성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에서 모라비안운동은 진젠도르프와 웨슬레 사이의 성격적 차이로 마침내 불화를 가져왔고 거기에서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페터골목 단체'의 1739년 1월 1일의 사랑의 잔치를 메도디스트와 모라비안의 교제의 절정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교제는 급(急)강하하게 되었다. 그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라비안의 '고요의 교리' 때문이었다. '고요의 교리'는 필립 헨리 몰더(Philip Henry Molther)라는 사람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그는 알사스 사람으로 진젠도르프의 영향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바니아에 가는 도중에 선편 사정 때문에 영국 런던에 와었는데, 런던 체류 기간동안 '페터골목 단체'에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족한 영어에도 불구하고 그 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차고 넘쳤고, 낮에는 가정을 방문하여 권고하였고 밤에는 그룹 집회를 가졌다. 그의 은혜의 강조의 설교에 청중은 큰 축복을 받았다. 몰더의, 루터가 말한 칭의 교리의 강조와 히스테릭한 청중의 감정의 표현에 대한 반대는 웨슬레의 찬성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드디어 1740년 웨슬레는 '사랑의 잔치'에서 그를 좇는 18,9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거기에서 나왔고, 웨슬레와 모라비안은 그렇게 이별하게 되었다. '페터골목의 단체'가 원래는 앵글리칸이 주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모라비안의 완전한 단체가 되었다. 그로써 사람들은 그들을 분리주의자로 낙인을 찍게 되었다.

1741년 슈판겐버그(Spangenberg) 도착 후 모라비안의 독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리엔본(Marienborn)의 대회의 소식을 가지고 왔었다. 그 대회는 1741년 8월 진젠도르프의 주재하에 영국, 독일의 대표가 참석한 대회였다. 거기에서 그들 운명의 두 가지 방향이 결정되었는데, 우선적으로 관심의 분야는 해외선교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영국에서 그들의 본부를 요크샤의 풀네크에 둔다는 내용이었다. 1742년 10월 페터골목의 단체는 '형제단의 회중'(a Congregation of 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영국교회로 부터 분리를 결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하나의 분파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진젠도르프와 다비드 니춰만(David Nitschman)은 켄터버리의 대주교에게 그들의 입장을 밝혔는데, 그들은 모라비안이라는 말과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1742년 그들이 그렇게 하나의 단체를 형성함으로써 부흥은 일단 정지하였다. 그러나 웨슬레가 떠난후 그들의 운동이 약화되지 않고 '봉사의 정신'(the sprit of service)을 보임에 아낌이 없었다. 런던에서 그들은 비상한 영적 능력을 힘입었고, 회중은 항상 차고 넘쳤으며, 비숫한 단체들의 생성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은 편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후원과 찬사를 보내었다. 그들의 인원들은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고 위로를 줌에 인색하지 않았다. 방랑자와 타락한 자들을 위하여 구제의 손길을 폈다. 공장 노동자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걸인에게 음식을 주었다. 그들의 본부인 요크샤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은 거칠고 타락하고 잔인하였다. 닭싸움, 소를 괴롭히는 일 등을 즐겼고, 특별히 다른 군들의 사람들보다 더 그것이 심한 상태였다. 모라비안의 기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일으킬 부흥을 준비하셨다.

벤자민 잉함(Benjamin Ingham)은 1737년 웨슬레 사람으로 옥스포드의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어 미국으로 갈 때 시몬드(Simmonds) 선상에서 모라비안을 본 것이 처음이었고, 미국 사바놀라에서 또한 그들을 인상깊게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들을 경건하고 평온한 천국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다시 돌아왔고, 자기 고향 요크샤 지역에서 순회전도를 하였다. 그는 다시 죠지아에 가기 이전에 인디안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인디안 언어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편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본국에서나 해외에서 모두 성공적으로 일하였다. 그가 웨이커필더(Wakefield)에서 설교하였을 때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그는 그처럼 옥스포드의 메도디스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모라비안에게 영향을 입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39년 모라비안의 새해의 집회에 참석하였고,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자기 고향 요크샤로 돌아가 사도적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다. 그의 설교가 있은 후 그해 1월 6일 요크샤 교구에서 더 이상 설교하는 것은 금지를 당하게 되었다. 그에게 내린 금지령이 그를 막지 못하였다. 그는 거리에서, 시장에서, 동네 어귀에서 어디서나 설교를 하였다. 그는 결국 50개의 우의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는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런던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런던의 슈판겐버그가 26명의 남녀 순례자들을 보내어 그를 보조하게 하였다. 그는 풀네크(Fulneck)에 본부를 정하였다. 10여 곳에서 정구적인 설교의 장소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락에서 영적 조직을 가졌다.

요크샤에서 그들의 전도는 순전하고 간단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형제단으로 만들려는 것보다 기독교인으로 만들려 하였다. 요크샤에서 그들의 노력의 열매는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지만 형제단에 가입한 사람은 단지 62명 뿐이었다. 만약 가입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2년의 시험기간을 주었다. 그들은 한 사람의 양을 얻으려는 것보다 될 수 있는 대로 교인들을 자기교회로 돌려보내는 일을 한 것이다. 만약 기어코 자기의 본 교회를 떠나기를 거절하는 자만이 엄격한 시험을 통한 후 회원으로 받아들여 졌다. 그들의 그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크샤의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게 되었다. 1749년 공식적인 인정을 얻을 때까지 그들은 분리주의자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흔히 '독일인', '헤른후트인', '반 명목론자'들이라고 불려졌다. 그들에 대한 반대는 1742년에서 1745녀 까지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러한 반대에는 다섯가지 원인이 있음을 훌튼(J.E. Hulton)이 지적하였다.

① 그들의 운동이 독일인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
② 그들의 훈련이 너무 엄격하였다는 점,
③ 그들이 감각적인것을 피하고, 주를 조용히 기다림을 강조하는 고요의 교리에 원인이 있다는 점
④ 불완전한 교리와 실천이라는 오해,
⑤ 그들이 비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었다. (예 : '피와 상처의 신학')

노담톤(Northampton)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 오컬리(Francis Okeiy)가 설교하는데 찾아왔다. 랑크샤와 체샤에서 헌틴턴 후작의 종이었던 데이비드 테일러(David Taylor)를 찾았다. 쟌 카드웰(John Caidwell)은 스코틀랜드를 복음화하였는데, 아일(Ayr)을 본부로 삼고 거기에서 40여개의 도시에로 전도를 위해 순회하였다. 에딘버러와 글라스고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 이들 모든 지역이 나중 장로교의 감독하에 들어갔다. 형제단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쟌 게닉(John Connick)은 '월트샤의 사도'(Apostle of Wiltshire)로 불리었는데,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17년간 축복의 전도를 하였던 사람이다. 대영국에서 그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어떤 곳도 없었다.


3. 진젠도르프 백작

모라비안 중에는 기술공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해외에서 선교사역을 하면 서도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장사도 하였다. 모라비안 선교의 이론에 따르면 선교사를 후원하는 것으로는 세계복음화를 위한 재정을 충분히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한다.

라브라도에서는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장사를 하여 남긴 돈으로 에스키모인들의 생활 필수품까지 무료로 공급해 줄 수 있었다. 그들은 배와 상점을 소유하고 있었고 에스키모인들의 생산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즉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만 전하였을 뿐 아니라 생산활동을 극대화하는 것까지 후원했던 것이다. 남아메리카의 북단에 위치해 있는 수리남에서는 양복점, 시계공장, 제빵공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다. 그들의 경제적 영향력은 선교사업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그 결과 모라비안들은 18세기의 선교를 주도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윌리암 댄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라비안들이 남긴 최대의 공헌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통하여 복음전파를 하고 선교사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는데 있다. 모라비안들이 했던 선교사역을 잘 연구해 보면 설교자, 교사, 의사뿐 아니라 사업가도 복음을 온 세계로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8세기 개신교 선교사역에 큰 공헌을 한, 모든 역사를 통해 제일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독일에서 태어난 귀족 진젠도르백작이다. 진젠도르프 백작이 개신교에 끼친 공헌은 죤 웨슬리나 죠지 횟트필드에 필적한다고 하겠다. 그는 교회연합운동을 시도하였고 모라비아 형제회를 세웠음 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은 후에 '선교의 위대한 세기'가 오도록 윌리암 캐리를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데 있다.

진젠도르프는 1700년 부유한 귀족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재혼을 하였기 때문에 할머니와 숙모의 품에서 자라났다. 그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며 신앙적으로는 복음적 경건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자연히 그도 영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러한 경향은 그가 받은 교육에 의하여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열 살 때 그는 교육을 받으러 할레에 갔는데 거기서 위대한 루터교 경건주의 자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로부터 커다란 영적 감화를 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진젠도르프는 다른 열심있는 소년들과 '겨자씨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기독교적인 형제애를 가지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고 '세계의 모든 인류'를 사랑할 것을 서약하였다.

할레에서 학업을 마친 진젠도르프는 비텐베르크로 가서 그 당시로서는 귀족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법률을 공부했다. 그러나 출세와 장래가 보장된 그 길에서도 그는 아무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귀족가문의 전통으로는 용납될 수가 없었다. 1719년까지 아직 그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유럽을 여행하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 그의 인생 항로를 바꿔놓았다.그는 여행 중 한 미술품 전시회에 들렀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고 계시는 한 그림을 보았다. 그림 속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이 모든 고통을 나는 다 너를 위하여 겪는다. 이제 너는 나를 이해 무엇을 주겠느냐?'고 물으시는 것같은 영감을 그는 느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진젠도르프는 백작으로 호화롭게 사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구세주께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이다.

1722년 한 그룹의 기독교 피난 자들이, 나중에 '주님의 보호처'란 이름의 헤른후트로 명명된 베르텔스도르프에 있는 그의 영지로 피해 왔을 때 드디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 피난 자들을 맞아들인 것이 진젠도르프가 모라비안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헤른후트에서 진젠도르프 백작이 모든 피난 자들을 관대하게 맞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종교적 피난 자들이 계속 몰려왔으며 그의 영지는 집과 상점들이 건축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주자의 숫자가 많아 지가 차츰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종교적 배경 때문에 피난 자들은 서로간에 의견이 대립되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나중에는 헤른후트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첫 번째 피난자가 온 지 5년이 지난 1727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8월 13일 한 참석자의 말대로 성령께서 헤른후트에 강하게 임재하신 역사가 일어나 그 공동체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 부흥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교에 대한 헌신의 마음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이 모라비안 선교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사소한 교리의 차이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일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대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공동체 의식이 고조되었다. 하루 24시간동안, 일주일 내내 기도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이러한 기도운동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런 강력한 영적 부흥이 일어났지만 수 년 동안 아직 해외선교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덴마크 왕 크리스챤 6세의 대관식에 참여하게 된 진젠도르프는 한스 에게드에 의해 개종한 2명의 그리인랜드 원주민과 서인도 제도에서 온 한 명의 흑인을 소개받았다. 나중에 헤른후트를 방문하기도 했던 이들은 아주 간절하게 선교사의 파송을 간청하였다. 그로 인하여 진젠도르프는 강한 책임감과 긴박감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1년이 못되어 2명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을 버진 제도로 파송하였고 뒤이어 20년동안 이들 모라비안교도들은 그전에 모든 개신교와 성공회가 보냈던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수 선교사들을 보냈다.

대개 진젠도르프는 선교의 지도자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그는 직접 선교의 일선에 나서기도 하였다. 첫 번째 선교사를 파송한 지 몇 년이 지난 1738년 진젠도르프는 3명의 새로운 선교 자원자들을 데리고 카리브해까지 거서 이미 사역하고 있던 선교팀과 합류를 시켰는데 그들이 카리브해에 도착했을 때 그전의 사역자들은 모두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진젠도르프는 귀족이라는 특권과 권위를 사용하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또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원주민들을 위하여 매일 예배를 인도하는 한편선교회 조직을 개편하고 선교영역을 할당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교사역이 든든하게 진행되어 가는 것을 보고서야 유럽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2년 후 이번에는 미국 식민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선교사들과 인디안들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기도 하고 모라비안과 루터교의 합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교는 그의 초교파적 노력을 따라주지 않았으며 인디안들 사이에서의 사역도 신통치 못하였다.

비록 진젠도르프가 귀족의 권리를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우월감이나 자부심까지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로서 비참한 생활을 해 나갈 만큼 겸손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광야에서 생활을 해야 하고 매일매일 고되게 선교사의 일을 해 나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그는 인디안들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지만, 놀라운 것은 그 인디안 들을 복음화 시키겠다는 그 결심이 약화된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진정 훌륭한 지도자였다. 진젠도르프는 미국을 떠나기 전에 인디안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위해 20명의 선교사들을 더 증원해 주었다.

선교회 지도자로서 진젠도르프는 그를 신뢰하는 선교사들의 사역을 살피고 후원하기 위해 33년간을 해외 보냈다. 그의 방법은 단순하고 실제적이면서 오랜 기간의 검증을 거친 것이었다. 대부분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들로서 신학자의 훈련이 아닌 복음전도자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평신도 지도자급 선교사들은 장래성 있는 개종자들과 함께 일하며 말이 아닌 실생활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 하였으며 원주민들보다 부유한 생활을 하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았다. 이들의 주된 사역은 복음 전파였으며 지역의 정치나 경제적인 문제에 휘말리는 것은 되도록 삼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아주 간단한 메세지만을 전하였고 회심하기 전까지는 일부러 어떤 교리도 가르치지 않았다. 회심 후에는 신학적 가르침보다 신비한 체험 등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모라비안들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선교사역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아내와 가족들을 떠나기도 하였다. 젊은이들은 되도록 독신으로 있기를 원했으며 결혼하는 경우 그 배우자를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도 하였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대표적 예가 진젠도르프 자신이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유럽이나 해외로 자주 여행하였으며 그 기간이 때로는 10년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부재중에는 매우 능력이 많았던 그의 아내 에르드무트가 사업이나 법적인 일들을 떠맡았는데 부부관계가 별로 없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그녀가 오히려 더 소극적이 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서로간에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결혼생활 마지막 15년동안에는 문자 그대로 이름만의 부부생활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을 때 진젠도르프는 매우 비통해하였다. 그의 전기를 쓴 죤 웨인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작은 더욱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잘해 준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으레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너무나 지각없이 아내에게 대해 왔었다. 그녀 역시 한 사람의 여자이며 아내이고 어머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에르드무트에 대한 슬픔이 가시자 그는 농부 출신의 안나 니취만이라는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선교여행을 할 때 동행하였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신분보다 훨씬 낮은 천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가족의 성화가 성가시어서 그녀와의 결혼을 1년 이상이나 숨겼다. 안나는 비록 신분은 낮은 여자였지만 매우 헌신적인 모라비안 자매로서 영적인 신비주의 등에서 진젠도르프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나중에 선교사역에 해로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백작과 모라비안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강조하였다. 백작은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하는 그림을 보게 되는 순간 선교사역을 위해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이러한 경향은 너무 지나치게 되어서 나중에는 광신적인 신비주의가 되어 버렸다. 모라비안 형제자매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불건전하게 묘사하여 자신들이 형편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비하했다. 진젠도르프와 결혼하기 전에 안나가 교회의 회람용으로 쓴 한 구절을 보면 '쓸모 없는 벌레 같은 나라도 주님의 상처 속에 파묻히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고 백작 자신도 교인들에게 자기 자신을 '은총의 바다 속을 떠다니는 피묻은 작은 벌레'라고 표현하였다. '하찮은 자들의 모임'을 조직한 진젠도르프는 회원들에게 어린애와 같이 행동하고 자신들을 '보혈 속을 헤엄치는 피라미 한 마리'나 '그리스도의 상처 속에서 피를 빠는 조그만 벌'로 여기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모라비안들의 유별난 집착은 복음적인 기독교의 전통에서 벗어난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것이 선교에 미치는 악영향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난에 참여하려는 신비감에 빠지면 빠져들수록 다른 사람과 선교에 대한 관심은 희미해져만 갔다. 그들은 신비적인 체험만 강조하고 신앙의 실제적인 역할을 무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활동적으로 일하는 선교사들을 아직 영적으로 깊은 체험에 도달하지 못한 이로 치부하였고 선교사업은 자연히 쇠퇴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모라비안의 위대한 선교활동은 몰락 직전까지 가게 되었는데 다행히도 백작이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했다. 백작은 영적 상태가 심히 어둡게 된 것을 '인정'하고 이에 대처했다. 그래서 진젠도르프는 '악몽 같은'세월을 떨쳐 버리고 다시금 선교 사역에 매진하게 되었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선교에 대한 진젠도르프의 최대공헌은 그가 많은 남녀선교사들이 복음 증거하는 일에 일생을 헌신하도록 도전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온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증거한다는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땅 끝까지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이상에서 주로 18세기에 절정을 이룬 모라비안의 독일과 영국에서의 부흥과 선교 상황을 보았다. 그들의 교회는 홀랜드, 스위스, 덴마크, 스웨덴, 탄자니아, 남아프리카, 서인도, 가이아나, 수리암, 라부라돌, 미국등지에 있다. 그드르이 선교는 그린랜드, 남북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행하여졌다. 전 세계를 걸쳐 36만 1천명의 교세에 625처의 교회가 있다.


4. 결 론

모라비안 교회의 부흥운동은 오늘의 선교 방향에 중요한 빛을 비춘 역사적 운동이라 하겠다. 그들이 순수한 진리의 말씀에 열정을 가졌다는 점과 또한 교회나 교단 중심적이 되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 중심적인 운동으로 지향하였고, 그들의 많은 지도자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복음적인 신앙을 표방한 사실들이 그 운동을 그처럼 부패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게 한 원인이었으며, 그러한 점이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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