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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는 소망을 땅에 두며 행함은 소망을 하늘에 둡니다.

행위는 자신의 의지이며 행함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행위의 짐은 무거우며 행함의 짐은 가볍습니다.

행위는 사람이 심판자이며 행함은 하나님이 심판자 입니다.

행위는 가인이며 행함은 아벨입니다.

행위는 죽음의 증거이며 행함은 생명의 증거입니다.

행위는 두려움의 증거이며 행함은 기쁨의 증거입니다.

행위는 율법에 메이며 행함은 자유롭습니다.

행위의 중심은 육신이며 행함의 중심은 마음입니다.

행위는 스스로 높이며 행함은 스스로 낮춥니다.

행위는 교만하며 행함은 겸손합니다.

행위는 하루만 신앙이며 행함은 매일이 신앙입니다.

행위는 예배를 보며 행함은 예배를 드립니다.

행위는 말씀을 읽으며 행함은 말씀을 듣습니다.

행위는 내 주변을 위해 기도하며 행함은 복음화를 기도합니다.

행위는 헌금을 내며 행함은 예물을 드립니다.

행위는 육신의 복을 행함은 영적인 복을 사모합니다.

행위는 감사를 모르며 행함은 범사에 감사합니다.

행위는 불안함을 키우며 행함은 담대함을 키웁니다.

행위는 지식에 집착하며 행함은 지혜를 사모합니다.

행위는 판단하며 행함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비교하며 행함은 교제합니다.

행위는 정죄하며 행함은 이해합니다.

행위는 겉이 깔끔하며 행함은 속이 깔끔합니다.

행위는 자랑하며 행함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시기하며 행함은 배웁니다.

행위는 육신이 편하며 행함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행위는 편히 잠들지 못하며 행함은 편히 잠듭니다.

행위는 경쟁하며 행함은 돕습니다.

행위는 순간이며 행함은 영원입니다.

행위는 육신이 죽을까 하며 행함은 영이 죽을까 합니다.

행위는 물질의 크기이며 행함은 마음의 크기입니다.

행위는 겉으로 섬기며 행함은 마음 다해 섬깁니다.

행위는 낙심하며 행함은 굳게 의지합니다.

행위는 불평하며 행함은 만족합니다.

행위는 선택하며 행함은 가리지 않습니다.

행위는 과시하며 행함은 당연합니다.

행위는 소유를 위함이며 행함은 나누기 위함입니다.

행위의 선행은 고행이며 행함의 선행은 기쁨입니다.

행위는 나 같은 사람 없다하며 행함은 나 같은 사람 많다 합니다.

행위는 불신의 증거이며 행함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행위는 걱정하며 행함은 소망합니다.

행위는 사랑을 숙제로 여기며 행함은 사랑함니다.

행위는 필히 타락하며 행함은 필히 선합니다.

행위는 피조물을 높이며 행함은 하나님을 높입니다.

행위는 사람을 따라가며 행함은 주님을 따라갑니다.

행위는 의인이라 착각하고 행함은 죄인이라 착각합니다.

행위는 회개하면 된다 생각하고 행함은 회개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행위는 물질을 바쳐 회개하고 행함은 자신을 바쳐 회개합니다.

행위는 죽음이 두려우며 행함은 주님과의 관계가 끊기는 것이 두렵습니다.

행위는 세상의 모든 종교이며 행함은 단 하나 참 기독교 입니다.

행위는 넓은길이며 행함은 좁은길입니다.

행위는 99%이며 행함은 1%입니다.

행위는 보이는 것이며 행함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행위의 끝은 힘든 삶과 멸망이며 행함의 끝은 기쁜 삶과 영생입니다.







사람의 욕구란 것은 답답하게도 정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믿음 역시 답답하게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체 우리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저도 신앙생활의 거의 대부분은 저 의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되더냐는 말이지요. 정말 안믿겨서 미칠 지경 이었습니다.

그래서 꾀(행위)를 부렸습니다. 그냥 하라는 대로 아무 이유없이 해봤습니다.

결과는 역시 제자리 였습니다. 아니 더 망가져 버렸지요.

정말 하나님은 대체 우리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그렇게 의미없는 신앙생활을 하다 어느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한테 뭘 바라시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믿고 따라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당시 받았던 말씀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요? 가지가 나무에 영향을 줄수 있나요?

가지는 꺽여도 나무는 죽지 않습니다. 가지는 그저 받아먹고 열매를 맺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열매를 맺으려 안간힘을 썼더라는 것이지요.

이 대단한 교만함을 본 저는 내가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돌아봤습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철저히 내가 중심이었고 주님은 한쪽 구석에 두고 있었습니다.

가지가 심하게 교만해서 나무보다 훨씬 커졌으니 나무가 보일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가지는 꺽이기 마련입니다. 더러운 열매로 쓸모가 없어진 가지는 쓸모가 없습니다.

새롭게 태어나 농부에게 접붙임 받아야 진정한 열매를 거둘수 있겠지요.



이 말씀을 처음 접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많이 접한 말씀 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씀을 안다고만 생각했지 알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교만이요. 마음이 열리지 않고 머리만 열어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여는 것은 제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우연치 않게 열린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설교에 마음이 열린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열린겁니다.

제가 아무런 생각하지 않을때 마음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드디어 믿음을 허락하시고 참된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목사님의 설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이 아닌

목사님의 입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듣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그저 주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는 존재로 생각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아무 생각없이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감당할 지혜를 받아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수많은 교만함 중에 하나를 주님의 능력으로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읽어 나갑니다. 이제는 주님의 고난이 그려지고 주님을 못박는 저를 발견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추악한 죄인인 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짐승같은 저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가슴을 치고 후회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짧게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회개는 제 인생에서 처음 있는 사건 이었습니다.

길게 이야기 할수 없었습니다. 더러운 사람은 씻어달라 구할 뿐입니다. 저의 죄를 씻어주세요.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 해주십니다. 그 감격의 기쁨을 사람의 입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을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보혈의 능력으로는 덮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능치 못할 것은 없습니다.

예민하고 의심만은 저는 믿음으로 또 다시 예민함과 의심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낸 결론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복음이다.

그 사람을 진정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

단언코 복음 말고는 세상에서 고통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고통에 싸워 이길 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후에는 천국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소망과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바로 성도들의 회개와 인류의 복음화 입니다.

이 길만이 이 땅에서 천국을 볼 수 있는 길이고 고통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한다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 깊게 생각해 보면 제 욕심 일수 있습니다.

복음이 넘치는 세상이라면 더이상 두려움에 고통받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세상. 이런 사랑이 당연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어찌보면 제 꿈이자 욕심입니다.

이렇듯 사랑이라 이야기 하는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는 제 욕심임을 봅니다.

그렇기에 내가 크다. 내가 작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이며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을 떠났다면 회개하고 주님앞에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회개로 인한 마음의 변화로 말씀에 순종하고 자기 능력에 만족하며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는것 없는 사람이지만 이야기 하고 싶은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가리려는 사단의 강력한 방해 공작을 봅니다.

바리새인에게 율법으로 영안을 가린것과 같이 현 시대 성도들에게 행위로 영안을 가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행위가 먼저가 아닙니다. 믿음 없이는 행할 수 없음을 압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위와 행함이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상태는 정반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 속 계명이라고 해도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숙제가 되고 행위가 됩니다.

마음에 새겼다고 해도 주님에 의지하지 않으면 숙제가 되고 행위가 됩니다. 행함은 순종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셔야 우리가 온전하게 순종하며 행할 수 있음을 압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회개함 만이 우리가 다시 태어나 사랑을 회복해 마음으로 행할 수 있는 길입니다.

수억만번을 강조해도 모자랍니다. 사랑 없이는 우리가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행위로 우리 육신의 욕구를 잡을 수 없듯이 행위로 믿음을 절대 얻을 수 없으며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그것들을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믿음도 은혜입니다.

행위에 단련되면 믿음조차 내 생각대로 된다고 착각하게 되며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반면 행함에 단련되면 담대한 믿음이 생기고 사랑을 나눔으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둘의 겉모습은 같을지라도 이렇게 시작과 결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나타냅니다.



행함에 있어 내 노력은 틈틈히 나오는 죄악 즉 욕구를 주님의 십자가 앞에 가져다 놓는 정도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욕구에 못이겨 매인바 되면 사단의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고 거듭났다고 해도 육신의 습관은 남아있기에 방심하면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직접 섬긴 믿음있는 사도들도 실수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가 실수를 안하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일 죽어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왜 스스로를 죽이는 바보같은 짓을 하냐고 묻는 분이 계실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평화와 자유함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삶이 기쁨의 삶이고 그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육신에 매여 고통당하는 죽음의 삶으로 가고 싶지 않은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는 것이 내가 다시 사는 길임을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회개해 마음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주신 능력대로 자연스럽게 순종하며 행합니다.

참 사랑을 안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행하는 것이 숙제가 아닙니다. 신앙이 바로 삶입니다.

하지만 행위에 근거한 신앙은 신앙과 삶이 분리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삶과 분리 된 신앙은 잘못된 기복신앙, 신비주의, 이단에 빠지기 쉬우며 영적 분별력을 잃게됩니다.

말씀을 믿는 저는 물질의 복, 신비로운 은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각각 맞는 복과 은사를 그때 그때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구원의 방법 즉 행위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맞는 말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방법에 취해 육신의 행위로 신앙생활을 하면 믿기가 어려워 집니다. 믿음조차 방법으로 만듭니다.

믿음은 성령의 영역으로 자연스러운 사랑에서 오는 자유와 기쁨이지 부자연스러운 고행이 아닙니다.

행위는 육신의 의지이지 성령의 의지가 아닙니다. 행위의 신앙은 결국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위로 인한 방법에 취해있다면 종교다원주의를 분별하기 힘들어집니다.



내 의지로는 결국 교만에 빠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의 길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해서 결국 내가 커지기 때문에 복음이 가리워 지는 것입니다.

행위는 내가 해결 못하는 부분을 결국 내 앞에 다시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사람은 능력이 없습니다.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본인에게 다시 가져와봐야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짐승이나 물건에 절하고 우상숭배하는 극단적인 영적음행까지 저지릅니다.

사람은 보이는 물건에 초자연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안심합니다만 시작이 사람이었기 때문에 능력도 없습니다.

사람이 의미를 부여한 능력없는 물건은 본질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육신의 욕구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적음행은 극심한 육신의 죄악으로 이어지며 결국 추악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또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본인에게 다시 가져온 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름만 다를뿐 다 같으며 그길은 진리와는 동떨어진 길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겸손함 만이 본질을 알수 있으며 해결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믿음의 회개로 인한 마음의 회심 없이는 필히 죄악에 노출됩니다. 죄에는 크기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세우기 때문에 죄를 구분하는 것이며 이로인해 본질을 알지 못해 회개할 수 없습니다.

생각만으로 간음했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욕구와 그것을 좋게 여기는 마음 상태가 죄악입니다.

그 죄악으로 인해 우리가 죽음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죽기 싫은것은 누구나 가진 본능입니다.

때문에 온갖 걱정으로 보호하며 그 과정 중 육신의 욕구에 빠져 다시 죄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수만가지 육신의 욕구가 바로 죄악인 것입니다. 그 욕구들에 자유함 받아야 합니다.

회개해 돌이키지 않으면 불행하게 행위=>교만=>죄악=>행위의 쳇바퀴 삶을 살다가 결국은 죽게됩니다.

회개함이 행복한 삶입니다. 술(행위)깨면 고달픈 삶이 아닙니다. 영원히 행복한 삶입니다.



신앙의 행위는 신앙생활의 방법이라 볼수 있습니다. 곧 율법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행위를 세상의 법에 빗대어 봅니다. 세상의 법은 삶의 방법이라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을 지켜야 합니까? 아니면 지키지 않아야 합니까?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법이 우리의 짐이 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에게는 그 법이 도리어 죄악을 가르쳐 줍니다.

예로 TV등 세상의 매체가 마약의 심각성을 백번 떠들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매체들이나 프로그램이 오히려 마약의 쾌감을 알려 주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약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땅히 선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해결이 되기는 커녕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도 마찬가지 입니다. 행위로 인해 육신의 욕구를 더 키우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행위(율법)가 악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땅히 선한 것입니다.

세상의 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율법은 선한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교만)과 성령(겸손)은 서로 반대 이기에 육신의 욕구(행위)로는 아무도 지킬수 없습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임하는 것이며 회개와 거듭남은 그 증거입니다.

육신의 행위는 육신(땅)을 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순종)은 성령(하늘)을 더합니다.

육신의 행위는 필히 죄악을 낳습니다. 그 죄악은 말로 나열해도 끝이 없지만 교만함이 그 증거입니다.

교만함으로 인한 모든 죄악이 어떻습니까? 분명히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없고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성령의 행함은 어떻습니까? 필히 선합니다. 선함을 말로 다 할수 없지만 겸손함이 그 증거입니다.

겸손함으로 인한 모든 선이 어떻습니까? 분명히 그 중심에는 하나님만 계십니다.

이렇듯 육신과 성령은 서로 대립의 관계에 있기에 육신의 행위로는 절대 선할 수 없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방법입니다.

판단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육신의 욕구로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판단에 정죄받은 사람은 겉으로는 수긍할 수 있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키웁니다.

육신의 법은 이렇듯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고 그것을 좋다. 하기에 법의 짐을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함이며 율법의 자유함은 곧 죄악에서 자유함이 됩니다.

법에서 자유한 우리가 법을 안지켜도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지키는 것이 즐거운 사람입니다.

법아래 매인바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법을 다스리며 법없이도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늘 시민권을 얻은자로 당연히 지켜져야 합니다.

단 율법을 즐거워하고 영의 욕구를 사모하며 연약함을 인정함으로 겸손히 말씀에 의지하며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육신에 거듭난 사람은 자연스레 영적인 부분을 사모하게 되며 율법을 즐거워 합니다.



사람이란 놀랍게도 순리를 가르쳐 주면 역리를 습득합니다.

때문에 땅의 욕구에 지배 당한 세상은 비정상이 정상이 되고 진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삶은 육신의 욕구를 누릴수 없기에 불행한 삶이라 생각하며 핍박합니다.

절대로 불행한 삶이 아닙니다. 진리의 삶이야 말로 진짜 자유의 삶이며 평화의 삶입니다.

세계 평화, 자유, 인권을 외치는 이들을 보십시요. 그들이 세계 평화를 위한 사도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사랑은 쟁취(육신의 행위)할 수 없으며 자유또한 쟁취(육신의 행위)할 수 없습니다.



현시대 세계 평화, 자유, 인권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육신의 욕구를 합법적으로 누리자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즘 외치는 세계 평화, 자유와 인권은 사랑의 감정이 아닌 육신의 욕구에 불과합니다.

육신의 욕구 중 선한 것이 단 한가지라도 있습니까? 단언컨데 한가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악함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합니까? 단언하건데 복음화로 인한 사랑 외에는 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반대입니다. 육신의 평화, 자유, 인권을 위해 육신의 행위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구와 육신의 욕구가 어우러지면 죄악은 걷잡을수 없이 퍼지게 됩니다. 증거는 바로 전쟁과 폭력시위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우리는 두려움에 존재를 잃어가고 선한 책망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갑니다.

때문에 육신의 욕구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그 결론은 자유가 아니라 공산주의에 가까워 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권력은 점점 하나로 모일 수밖에 없고 그 권력을 공포심으로 유지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 평화입니까?






사단은 점점 악을 선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후에는 의미없는 행동도 범죄가 되어 숨이 막힐 것입니다.

사람이 심판자가 되는 사랑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로 분내고 싸우며 폭력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이런 폭력이나 시위를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힘으로 진압할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에게 육신의 고통을 줘야 말을 듣게 할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국민들 자신들은 강압을 싫어하면서 똑같이 시위로 폭력을 휘두르며 지도층을 강압하려 할까요?

사단은 사람에게 육신의 고통을 줘야 말을 듣게 할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폭력에는 종류가 없습니다. 단지 강자와 약자만이 존재 할 뿐입니다. 국민은 약자고 지도층은 강자입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려면 또 다른 강자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결국 또 다른 강자에게 지배 당하는 악순환입니다.

나도 사람이고 지도층도 사람임을 깨닫는다면 내가 분내면 그들도 분낼것을 쉽게 알수 있는데 속는 것입니다.

지도자나 국민이나 이렇듯 똑같이 사단의 기만에 속고 있기 때문에 이런 어이없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구와 육신의 욕구가 만나면 이렇듯 죄악에 빠져 어두움에 분별할 수 없습니다. 빛으로 나와야 합니다.

어두움과 어두움이 만나봤자 결과는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을 밀어내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행위 => 의심 => 방법 => 지식 => 교만 => 판단 => 강압 => 불신 => 죄악 => 불행 => 행위에 의존 입니다.

신앙생활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 되는 공식? 입니다. 이대로는 돌고 도는 고통 뿐입니다.

사랑의 회복이 절실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회개하고 육신에 거듭나지 못하면 불행의 삶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부분을 알기 때문에 더 말씀에 의지하며 단련함으로 육신의 행위에 자유하고 삶과 신앙이 일치됩니다.

복음에 의한 사랑의 회복이 아니라면 삶과 신앙의 어떤 문제도 해결할 방법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복음에 빚진자 이며 그 사랑의 빚을 고통중인 세상의 사람에게 갚아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세상에 갚아야 합니다.

갚는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챙겨온다면(비교, 자만 등등) 온전히 갚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에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거리의 본질인 죄악을 대속한 구주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과 보혈 흘리심으로 죄악의 짐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죽음까지 이기시고 부활 하심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간단한 삶을 사신게 아닙니다.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이런분은 예수님 단 한분 뿐입니다.

그렇기에 진리요. 나의 구주요.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다. 확신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과 부활을 믿음으로 회개한 사람은 본질이 해결되고 육신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은혜를 얻은 우리는 다시 태어나 감사하며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추악한 죄인인 사람이란 서로 잘난것이 단 한가지도 없기에 주님만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지함과 순종함의 힘은 놀라워서 내 죄악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는 세상에 단 하나 뿐입니다. 그렇기에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해결 방법을 찾지 마세요. 신앙의 방법인 행위에 의지함은 바로 의심의 증거이며 이는 불신으로 이어진 죄악입니다.



내 눈앞의 모든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내 이름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내 승리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 승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선물입니다.

내 실패에도 의미를 부여하지 마세요. 그 실패는 하나님의 연단이며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의미를 부여하고 방법을 찾는 순간 순종이 행위가 됩니다. 다른것 구하지 마시고 믿음만 구해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바쳐 회개하는 길만이 우리가 사랑을 회복하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http://cafe.daum.net/cgsbong

필 자 ZODDL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1동 장로회 새샘교회 zets_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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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위와 행함 그리고 이땅의 종교 이재섭 2012.01.25 3075
111 믿음은 하나님을 배경삼는 것 이재섭 2012.01.21 3130
110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한 16가지 원리들 file 이재섭 2011.12.30 3291
109 두개의 가치관 file 이재섭 2011.08.19 4365
108 돌보는 상담자 이재섭 2011.08.18 3305
107 말세의 징조{딤3:1-17} 이재섭 2011.07.08 3223
106 하나님이 찾으시는 일꾼 이재섭 2011.06.29 3548
105 하나님 기뻐하시는 기도 이재섭 2011.06.16 3717
104 분명함과 희미함 이재섭 2011.05.18 3268
103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54 이재섭 2011.05.08 3834
102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 / 차성도 교수 이재섭 2011.04.25 3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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