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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서 성격의 태동 / 김종완(수필가· 평론가)

언제부턴가 사람들을 만나면 수필을 쓰라고 했다. 난 분명 그들에게 미학적 성취를 위해서 수필을 쓰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수필이 천재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미학적 성취는 다음 일이고, 나(자아)를 찾는 방법으로,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당신의 상처마저 치유된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정말로 글을 썼다고 하자. 그리고는 이번에 책을 묶는데 발문을 써달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난 이 글을 쓰면서 그런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내가 살려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떠어떠한 대목을 몇 개 들고는 뛰어난 미학적인 성취라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상찬을 해야 할까? 아니면 기구한 삶의 여울목을 가리키며 위대한 인간승리이니 우리 함께 감격하자고 해야 할까? 그의 성실한 삶의 자세에서 함께 배우자고 해야 할까?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내 스스로 형용모순에 빠질 공산이 다분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둥근 삼각형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건 함정이다. 난 우선 나를 구원해야 한다.

윤상기, 그는 뛰어난 수필가인가? 이 글이 해설 형식을 빈 발문이라는 걸 안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암, 훌륭한 수필가이고말고.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는가? 그걸 질문이라고 해? 훌륭한 수필가라 했으니 훌륭한 수필가가 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겄제. 정말 그런가? 아니, 모르겠다. 그러면 당신은 왜 만나는 사람마다 수필을 쓰라고 했는가? 당신의 지론에 의하면 수필을 쓰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며? 나는 답해야 한다. 내가 사기친 게 아니라면 갑남을녀가 정직히 쓴 글은 미학적인 성취에 미흡했을지라도 문학적 성취만은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학적 성취 없이 문학적 성취는 가능한가? 고민하고 고민했다. 며칠째 책상 앞을 떠나 떠돌고 떠돌았다. 그러다 더는 어쩔 수 없어 억지로 글을 쓰거나 그것도 정 안 되면 포기하기 위해 다시 책상에 앉았을 때 나는 답을 찾았다. 답은 바로 물음의 그 자리에 있었다. 물음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은 진리다. 그 답은 ‘정직’이다. 정직. 문제는 문학에서의 정직이란 도덕 교과서에서 배운 정직과는 차원이 다른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문학에서 정직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정직이 어떻게 문학적 성취를 이루는가를 찾아야 한다. 아니면 정직하지 못하면 문학적 성취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다시 묻는다. 윤상기의 글은 정직한가?

󰡔기린봉 달 토하고󰡕는 윤상기의 첫 번째 수필집이다. 윤상기는 환갑이 넘은 사람이다. 그는 환갑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이순耳順이라고 한다. 사람이란 60이 되면 절로 귀가 순해진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적어도 자기는 그 나이에 귀가 순해졌다고 믿는 것일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부터 문자깨나 한다는 사람들이 그리 써왔고, 본인도 육십보다는 이순이라고 써야 문장을 썼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랬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심리의 이면에서 그의 성격의 일단을 찾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기존의 관습을 거부하거나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추수追隨하는 것. 우리는 이런 사람을 흔히 보수주의자라 부른다. 그는 인생의 이모작을 착실히 준비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모작의 뒷감당에 쩔쩔매는 현실인데 반해, 그가 적어도 가볍게 그간의 성과를 뒤로 하고 이모작에 뛰어든 것을 보면 일모작에 대단히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기린봉……󰡕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성공한 일모작의 작황 보고서다. 작황은 어떤가? 대풍이다. 본인은 만족하는가? 만족하고말고. 돌이켜보면 그 많던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추수를 마쳤다는 게 대견하기도 하다. 물론 그는 대단히 예의가 바르고, 사람이란 마땅히 겸손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어서 결코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나보다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나와 봐라 그래, 하는 자신감도 내심 있을 것 같다. 시골에서 소 판돈 훔쳐 가출해서 성공한 정주영 스토리만 성공신화가 아니라, 중학교도 보내지 않으려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은 그 못지않은 또 하나의 성공신화다. 그는 힘들고 힘들 때마다 성공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꼭 성공하련다. 그 성공의 기준은 뭣인가.

성공을 바라보는 사회 통념의 기존에 하나도 빠지지 않는 그런 성공이다. 그는 그걸 이루었다. 정말로 이루고 말았다. 누가 봐도 성공했다. 결코 돈만 번 것이 아니다. 정신적 풍요도 얻었다. 그런데 조금 부족하다. 뭐가? 그는 자취를 남기고 싶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냈는데 흔적 없이 사라지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다. 그때 그에게 수필쓰기가 다가왔다. 수필이란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쓴다며? 그런 그에게 수필쓰기는 곧 자서전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 󰡔기린봉……󰡕의 성격은 자서전이다. 대학부설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을 쓰기 시작한 지 겨우 2∼3년 만에 그간에 쓴 글로 책을 묶는다면 문학의 내공이 웬만큼 쌓인 사람의 원고가 아니라면 그게 습작노트이지 작품집이겠는가. 그러나 난 그의 원고를 버리라고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고민했다. 분명 버리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이 과연 무엇인가? 답은 그게 그의 자서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하게 살아왔다. 정말 존경할 만하다. 한 십 년 후 그의 문장이 일취월장한다고 그가 살아 온 삶이 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약간은 더듬거릴지라도 지금 말하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이 정해졌다. 그의 삶에서 정말 훌륭하다는 것들을 찾아내면 된다. 그리고 그게 왜 훌륭한가라는 훌륭함의 이유를 세워야 한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집에서 농사를 지으라면서 중학교 진학을 허락하지 않아 일 년 동안 지게와 꼴망태를 메고 농사일을 도왔다. “꼴을 베다가 먼빛으로 교복 입은 친구들이 보이면 창피해서 보리밭에 엎드려 있기도 했다.” 그 다음 해 어머니의 도움으로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고, 중학교까지 이십 리 길을 걸어 다녔다. “그 길이 외진 벽촌을 벗어나는 첫 번째 관문이나 되는 양,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결기를 세웠다.” 고등학교도 아버지 몰래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쳤다. 전주에 있는 공고 토목과를 선택하였다. 친구와 방 한 칸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다. “주말이 되면 차비가 없어 칠십 리나 떨어진 집까지 걸어야 했다. 어머니는 내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머리에 채소를 산더미같이 이고 5일장을 헤매고 다니셨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쓰려, 오직 빨리 성공하겠다는 각오뿐이었다. 어머니의 그 희생이 없었으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윤복의 일기로 세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져 전 국민을 울렸던 1960년대 가난 이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있었다. 그와 비견될 만한 또 하나의 60년대식 비극적인 가난 이야기다. 가난은 분명 비극이다. 그 비극에서 무엇을 배우느냐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능력이다. 윤상기의 성장기는 비극미를 극대화시킬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영화를 한 편 찍어 보자. 유교적 인습에 찌든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 향학열에 불타는 주인공. 주인공 소년은 주변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이기고 성공한다. 성공코자하는 열망의 가장 큰 원인은 고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효도다. 어머니의 끝없는 헌신에 합당한 아들의 효심이다. 도시로 나온 아들은 엄마가 보고 싶어 70리 길을 걸어서 간다. 어머니는 아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머리에 채소를 산더미같이 이고 5일장을 헤매고 다니셨다. 아들이 서울 회사에 취직해서 상경하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자. 그 사이에 빠져서는 안 될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의 뉘우침이다. 효자 아들은 결국 완고한 아버지마저 변화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아버지의 화려한 외출」이다. 이 작품은 그의 성장기의 구체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미있게도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총망라해서 줄거리만을 쓴 것이 「기린봉 달 토하고」이고, 결국 그 구체적 이야기가 작품집 󰡔기린봉 달 토하고󰡕에 흩어져 있다. 마치 축약본과 정본이 따로따로인 것 같다.

아들은 학과에서 첫 번째로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되어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다. 첫 번째 근무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입체교차로가 시공되는 용산 삼각지였고 두 번째는 강원도 소양강 댐 공사현장이었다.
우선 여기까지만 정리해 보자. 독자는 이 책 어디를 읽어보아도 이 작가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 좌절하지 않고 성공해주었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그가 믿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고마운 일이다. 드디어 그는 사비私費를 들여 캄보디아에 교회와 고아원을 지어주었다(「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다. 돌아보면 삶이 작품인 거야. 천지를 창조한 신만 위대한 게 아니고 이런 삶을 살아 준 자신도 위대한 거다. 글을 쓰면서 고생한 대목에선 그땐 사느라고 바빠 울지도 못 했는데 이제야 설움이 터져 서럽게 울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 보니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준 아내도,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도 고맙고……, 고맙지 않은 존재가 없다. 자취를 남기고 싶다. 글로 써서 자신이 살아 온 삶을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타에 귀감이 되는 삶을 살았고 사실에 입각해서 충실하게 기록했다. 자서전으로의 문학은 일단 완성되었다. 책을 내고 주변에서 당신의 삶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된다. 몇 권은 남겼다가 손자가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 할 때 볼 수 있도록 해라. 돈을 남기면 써버리면 그만이지만 이건 혼을 남기는 것이니 길이길이 보존될 것이다. 이젠 됐다.

그런데 이 작가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정말 불행히도 문학을 제대로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길이 얼마나 험한 길이라는 걸 알고 덤비는 걸까?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고, 완성이 없는 길이다. 견딜만하다면 나서서는 안 될 길이다. 수필작가라는 직함이야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딸 수 있고, 따서 이제 그의 성공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수필집도 하나 묶었으니 이젠 그냥 취미 삼아, 놀이 삼아 문학한다고 폼만 잡으면 되는 일이다. 나이 들어 노는 놀이치곤 이보다 더 폼나는 것은 없으니까. 그러나 그는 분명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진짜 문학을 하러 덤벼든 것이다. 그것도 운명인가? 그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유순법인柔順法忍을 타고 났다. 그에게 기존의 사회질서는 개혁의 대상이기보다는 우선 그 기준에 자기가 부합되도록 스스로를 독려해서 맞추며 산다. 이런 사람의 대부분은 자기가 속한 조직 또는 사회에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 된다. 모법 학생이 자라서 모범 회사원이 되고 모범 남편이 되고 모범 아빠가 되고 모범 교인이 된다. 그런 그가 문학을 만났다. 모범 문학도가 되고자 했다. 그러다가 보고 말았다. 모범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기에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서 모범으로 살았는데, 정녕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렸다는 걸 안 것이다. 그래서 이 작가는 이제 다시 살기 위해 문학을 하려고 한다. 나는 다시 묻는다. 정말인가? 그렇다면 이제 다시 출발할 수 있는가? 당신이 문학인으로 다시 출발한다면 당신이 살아 온 이 훌륭한 삶들을 장사葬事지내야 한다. 모든 사회적 성취를 버리고 빈털터리로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그때의 환희가 환희가 아니었고 그때의 슬픔이 슬픔이 아니었음을 직시할 수가 있다. 수필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만이 아니라 그 기억의 무의식에 가려진 또 다른 자기를 찾아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가? 또 다시 묻자. 그럴 수 있는가? 작가에겐 작가로서의 경력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출가하는 사람에게 사회적 경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작가에겐 과거의 경험이 해부되고 해체되면서 작품의 재료가 될 뿐 그 결실은 포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 말에 오해 없기 바란다. 이 글이 실패한 글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이 글이 실패작이라면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수필이 실패작이다. 독자는 짜증이 났다. 말장난 하냐? 아니다. 우린 지금까지 수필을 이렇게 써 왔다. 특히나 이 작가처럼 글을 나이 먹어 ‘배워서 쓰는’ 작가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다. 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건 이 작가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수필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린 지금 과도기에 처해 있다. 그 어떤 누구도 과도기를 생략한 채 건너 뛸 수는 없다.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이제부터 우리 진짜로 문학을 한번 논해 보자.

2009년 최고의 히트작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기억할 것이다. 이 소설은 실종된 엄마를 가족 구성원 각자의 눈으로 회고한다. 아들의 회고 편. 첫 직장이 서울의 한 동사무소다. 자취방도 구하지 못해서 숙직을 대신 해주며 숙직실에서 기거했었다. 그곳에 엄마가 찾아왔다. 그리고 하룻밤을 잔다. 엄마는 똑똑한 아들을 결국은 말단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케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아들에게 미안해한다. 서로 말하지 않지만 아들은 되레 그게 더 마음이 쓰인다. 이제 󰡔기린봉……󰡕 이야기를 하자. 아들이 어머니를 회상하는 것은 똑같다. 윤상기는 자기의 삶에 가장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어머니를 자기 작품에 등장시켰지만 그 어머니는 텍스트 안에서 독립된 공간을 차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그가 회고하는 말에 묻어서 잠시 등장했다가 그 말이 끝나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비중 있는 어머니가 그러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이 말은 윤상기의 작품의 인물은 아직 성격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누구는 말할 것이다. 이것은 소설과 수필이라는 장르의 차이 때문이라고. 아니다. 아직까지 수필작법의 미발달로 생긴 문제일 뿐이다. 사실 이건 이 책의 저자 윤상기의 책임이 아니다. 우린 한 번도 수필에서 성격에 관한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문제제기다. 그러면 작가가 자신이라 믿고 있을 화자의 성격은 살았는가? 이 책이 자서전적 성격이 강한 책이라면 최소한 그건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그가 겪은 일과 그의 생각을 길게길게 들었는데 막상 말하는 사람의 성격이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성격이 언제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쓴 작가는 대단히 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 인내심이 엄청 강하다는 것 등등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왠지 나에겐 친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그의 심리의 변화를 다 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말 저 점잖음 속에 들끓는 그 무엇이 없을까 하고 도리어 궁금해지기도 한다. 농담 한 마디. 난 천국이 큰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입만 열면 예수예수 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면 안 갈 생각이다. 그들과 사는 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다. 지금 내 주변에 사는 사람들, 조금은 부족하고 가끔은 욕심 때문에 조금씩 불량기가 있고 어리석어 부모 살아계실 때 효도 다 하지 못했고 그러고도 형제에게 우애 다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다가, 그러다 술 먹으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울먹이기도 하는 심성이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함께 가고 싶다, 나에게 거기 함께 갈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천국이란 그런 곳이 아닐까.
과연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회의하지 않고 확신에 차 있는 사람과 회의하고 갈등하면서도 언젠가는 한 번이라도 올바르게 살겠다는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이다. 성격은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다. 평면적 인물의 묘사로는 성격이 탄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아버지는 완고하고 엄마는 항상 헌신적이고 아내는 순종적이고, 그걸 보여주기가 아닌 말하기로만 전한다. 그런 단선으로는 성격이 탄생하지 않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위대한 발견은 인간은 욕망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욕망하는 자에게 어찌 갈등이 없겠는가? 심리 저변에 대한 분석이 있어야 한다.

대개의 수필에서 욕망을 가진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욕망은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은 채,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완벽하게 헌신과 순종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성인이지. 어머니만 되면 갈등도 없고 번뇌도 없고 모순도 없는 성모 마리아가 되는가. 나의 어머니는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 보통의 사람이 어떻게 당신 자신에 대한 꿈과 욕망을 포기하면서 모든 것을 자식에게 걸게 되었을까. 이 신비의 과정을 그려야 한다. ‘순종적인 아내’도 그렇다. 수필 속 아내도 가끔은 대들고 따지고 욕심을 부리고 엉뚱한 일도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만 텍스트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된다. 한 마디로 성격이란 부딪침에서 형성된다. 자기 욕망과의 부딪침과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부딪침, 그 과정에서 갈등과 모순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한국 수필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갈등이나 모순을 드러내길 꺼린다. 그것은 점잖치 못한 짓이므로. 이미 다 이해한 상태로 주관적인 진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필 속의 어머니·아내는 거의 비슷한 모습이다. 성격이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런데 윤상기의 작품에서 드디어는 성격이 태동할 수 있는 징후를 보여준다.

그날따라 밤하늘은 얼어붙은 듯 투명했고 별빛마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낮은 초가지붕 위까지 내려앉은 찬란한 별들. 나는 문득 북극성을 가늠해 보며 고개를 젖혔다. 그때 유성 하나가 휙 떨어졌다. 내 꿈, 추락한 내 꿈의 잔영처럼 그것은 단호히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사라졌다. 유성이 긋고 지난 검은 하늘을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고향의 산천을 거부한 나였다. 남루한 웃을 벗어던지듯 뛰쳐나온 고향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내 신세가 너무 초라하단 생각이 들며 아득히 멀어진 고향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중략) 줄곧 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꿈꾸었다.
「기린봉 달 토하고」에서

가난한 농촌인 고향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출세한 줄 알았다. 그 해 졸업생 중에서 맨 처음으로 서울의 큰 건설회사로 취직이 되었을 때 ‘촌놈 서울생활이야 고생 좀 하겠지만 그런 고생쯤이야 이미 이골이 난 몸이고’ 이제 출세하는 것만 남은 줄 알았을 것이다. 주말이면 집으로 가는 70리 길을 걸으면서 그가 상상했던 그 청운의 꿈이 정말로 실현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환경은 자기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조직사회의 최말단이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회의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줄곧 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꿈꾸었다.” 이런 회의는 그를 성장시켜 드디어 사회적인 시선으로까지 확장된다.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헌집을 부수며 철거민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했다. 그들의 처절한 절규와 오열은 나를 더 남루하게 했다. 현장에서 비산飛散먼지를 뒤집어쓰고 얼굴은 햇빛에 검게 그을려 검둥이 같은 몰골로 나는 그 울부짖음에 귀를 막았다. 그들의 손을 부여잡지 못했고 오열하는 어깨를 보듬지 못했다. 개발이 살 길이라고 여겨지던 70년대 초였으니까. (중략) 나의 당위를 위해서 혹은 결기를 위해서 마셔댄 술이 이튿날까지 정신을 혼미하게 흔들곤 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외면한 그들의 울음은 아직도 내 가슴 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듯, 가끔 명치가 묵지근하다.

「기린봉 달 토하고」에서

인물이 성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묘사 없는 일방적 서술로는 힘들다. 인물이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성격이 생성된다. 우린 수필이 그리는 인물은 리얼리즘적 인물이라고 흔히 생각하기 쉽다. 직접 겪은 일을 그리기 때문에 사실적이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수필에서 인물의 성격에 대한 고찰이 전무했고, 그런 관계로 수필의 인물들은 성격을 갖지 못한 채 표정이 없는 포카페이스로 등장할 뿐이다. 리얼리즘적 인물을 전형적 인물이라고 한다. 전형이란 유형과는 다른 말로써 단순히 그 시대의 보편성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본질(보편성)을 예술적 특수성으로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전형적 인물이란 인물의 내면성이 환경의 모순을 넘어서려는 내적 욕구에 의해서 주체성과 독자성을 갖는 인물이다.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주체적인 내면을 갖춘 인물이다. 그렇다면 전형적이란 본래 타고나는 성격이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독자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그것은 끝없는 자기성찰에서 자란다. 즉 자기성장이 필수적이다.

간척사업현장에서 근무할 때이다. 바다 밑에 기초를 만들기 위해 바지선에 몇 톤이나 되는 바위 덩어리들을 실어다 푸른 바다 속으로 던졌다. 열 길이나 되는 바다는 그 거대한 바위 덩어리들을 삼키면서 잠시 포말을 일으킬 뿐. (중략) 바위덩어리가 물속에 가라앉을 때마다 내 몸도 깊은 물속에 빠져 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차마 바다를 바라보지 못했다. (중략) 그럴 때마다 나는 바다를 벗어나 어딘가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렇게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꿀꺽 꿀꺽 삼키면서 삼킨 기미조차 없는 무심한 바다를 향해서 수도 없이 바위 덩어리를 던지면, 어느 날엔가는 푸른 바다에 어머니 젖무덤처럼 봉긋이 바위덩어리가 솟아오른다. 그때의 감회란 형언할 수가 없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신화다. (중략) 그 성취와 신화의 순간은 짧고 고통과 번뇌의 시간은 길었다.
「기린봉 달 토하고」에서

이 대목은 자기성찰에 의한 자기성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는 수필에서 성격이란 성장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흔히 수필에서 화자는 성찰했다고 일방적으로 반성하고 새로운 결심을 맹세한다. 이게 성찰인가? 성찰이란 생각이 변하고 가치가 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뒤엎고 새로운 차원의 사유가 열렸다면, 그것을 겪은 사람은 반드시 그 낱낱의 과정에 대한 기억이 명멸할 것이다. 변하는 과정, 그 전환점에 반드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진정으로 이해한 자는 길고 지루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변화의 과정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여줄 수 있다. 그랬을 때 독자는 함께 경험하고 함께 성장한다. ‘독자와 함께’란 독자에게 그 과정(내면에서 일어나는 수없는 갈등과 다층적인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평의 독자들은 약간의 혼란을 겪을 것이다. 예문을 보니 정말 그럴싸하네. 그럼 윤상기의 문학의 인물들이 드디어 성격을 획득했단 말인가? 아직은 아니다. 우선은 「기린봉 달 토하고」같은 일대기를 사건별로 각각 독립시켜 그려야 한다. 일대기 속에는 인물들이 살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그 공간 안에서 사건들을 겪으면서 단순히 외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까지 생생하게 그려졌을 때 인물이 개성을 가지며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글의 서두에 문학에서의 정직에 대해서 말했었다. 그리고는 인물의 성격에 대해서 줄곧 말해왔다. 인물이 성격을 얻기 위해서는 텍스트 속에서 그곳의 주민이 되어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자세히 말해 보자. 사비로 캄보디아에 교회와 고아원을 지어준 사건을 쓴 게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①화자는 캄보디아 여행을 갔다. ②돌아와서도 아이들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③기도원 여름 수련원에 참석했다. ④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이 다시 생각났다. ⑤기도 중 이상한 경험을 했다. 무언지 모를 강한 힘이 내 안으로 소용돌이치며 들어오는 듯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기운이었다. ⑥ 3박 4일 동안 그들을 도울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⑦수련회가 끝난 후 교단 해외선교국을 찾아갔다. ⑧프놈펜에 교회와 고아원을 설립할 기부금에 참여하였다. ⑨하늘의 일을 하는데 어지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지인이 자기도 이 일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전해왔다. 고마웠다. 그분의 도움으로 이층에 여자어린이 숙소를 지을 수 있었다. ⑩하나님은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역사를 했다. ⑪처음 캄보디아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꼭 2년 만에 결실이 맺어졌다. 그는 프놈펜으로 가고 있다. 자정, 승객들이 모두 곤한 잠에 취해 있으나 화지는 잠이 들지 못한다. 남몰래 벅차오르는 이 설렘. ⑫다음 날, 덩까우 사랑의 교회와 고아원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기념식에 참석한다. ⑬교회입구에 환영 현수막과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교회와 고아원은 벽돌 슬라브조에 바닥은 하얀 대리석이 깔린 최신식 건물이다. ⑭어린아이 5, 60명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를 환영하였다. 반겨주는 아이들을 보듬고 기쁨의 뽀뽀를 해주었다. ⑮뽀르르 앞장서는 병아리같은 그들과 함께 이곳저곳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⑯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눈물, 사랑이 북받치는 우리 어린 날의 설움 같은 것이었다. ⑰아무 연고도 없는 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곳에 당신의 역사를 이루었다.

제목부터가 너무 위압적이다.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 그게 사랑이었다고, 그것도 국경을 뛰어 넘는 박애였다고 강변하고 있다. 어떤 불교도가 이런 식으로 비아냥거린다면 어쩔 것인가? “불교국가에 기독교 교회 세우는 게 포교활동의 일환이 아니고 국경을 뛰어 넘는 성스런 박애였다고?” 먼저 이 글은 이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한다. 문학이란 선악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불교국가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문학이 아니다. 문학에선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을 수 없다. 문학에선 절대선도 꼭 그렇기만 하는가, 라고 의심 되어야 하고 절대악도 똑같이 의심되어야 한다. 문학의 세계는 전복의 세계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그건 핑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내 다시 살아 그 상황이 된다할지라도 다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 글에서 문제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작가는 기독교도로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기독교식 어투로 씌어졌다는 게 우선 문제다(⑤⑥⑨⑩⑫⑯⑰) ⑤의 기도 중 그가 겪은 이상한 경험은 그의 이타행利他行을 종교적인 동기에 의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글이 포교용이 아니라면(하나님께 봉헌하는 글이 아니라면) ⑤를 빼고 ②(돌아와서도 아이들이 잊히지 않았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했다)를 이타행의 원인으로 삼자.

인물이 성격을 얻기 위해서는 구체성을 갖고 갈등해야 한다. 인물이 갈등하기 위해서는 ①은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화자는 캄보디아 여행에서 아마 Give me 1 dollar를 외치며 구걸하는 어린이들의 참상을 보았을 것이다. 가이드는 돈을 주면 안 된다고 했을 것이고. 한 아이에게 돈을 주면 벌떼처럼 몰려든다고 그리고 그들의 자활의지를 북돋우기 위해서는 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가난을 벗기 위해서는 구걸 대신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아 한다. 화자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돈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 갈등해야 한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서는 1달러가 필요하다. 그들의 간절한 눈동자를 외면했다. 아니 그 거지들이 불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실은 1달러가 없으면 그들 가족은 그날 밥을 굶어야 한다. 가고 싶어도 가야할 학교가 인근에 없다. 아니면 끼니가 불안한 그들은 구걸해서라도 배를 채워야지 그 시간에 배를 곯으면서 학교에 앉아 있을 수 없다 등등 화자가 갈등할 요소를 만들어야 한다. 한 아이의 간절한 눈동자와 대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서 한국동란 이후의 전쟁고아들의 절망스런 눈동자를 만날 수도 있다.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꼴망태를 지고 가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친구를 보고는 논두렁에 숨었던 나의 절망과 부끄러움을 회상할 수도 있다. 그런 절망을 이기고 난 성공했다. 그리고 이젠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내가 절망했을 때, 내가 방황하고 흔들렸을 때, 나를 지켜준 것은 신앙이었다. 이건 구체적일수록 좋다. 나는 나의 아들이 다시 정상인으로 일어날 수 있다면 나의 모든 걸 바치겠노라고 약속했었다. 신앙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무엇인가? 감사와 나눔이다. 다른 사람의 감사와 나눔 덕분에 내가 여기 있다. 이젠 내가 나누어야 할 때,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 나는 그곳에 교회와 고아원을 세우겠다고 결심한다. 한번 결심했다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내가 흔들릴 때마다 아내·가족·주변의 역할이 있었다. 주변 사람의 그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화자는 이 일은 하는 데 너무나도 많은 장애가 있었고 갈등과 고민이 있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건 돈만으론 되는 일이 아니더라는 발견이 있어야 하고 이타행利他行을 통해서 결국 내가 성장하더라는 고백도 필요할 것이다. 이건 순전히 이글의 주인공인 화자가 성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례를 무작위로 들어본 것이다.

수필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물이 성격을 획득한 과정이 정직해지는 과정 아닐까. 인물이 어떤 갈등도 거치지 않고 한 생각과 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 결국 한 생각과 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정직 아닐까? 인류가 가진 문서 중 가장 극적인 회의와 갈등을 나타낸 것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최후 장면일 것이다. 보스니아 출신의 철학가 지젝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그리스도의 한탄이 암시하는 대상은, 변덕스러운 전능한 성부(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능한 신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가 강하다고 믿었었는데 그 아버지가 자기를 도와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경악하는 아이와도 비슷하다(현대사에서 예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성부는, 딸이 윤간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보내는 연민과 비난이 뒤섞인 시선의 궁극적 외상을 견뎌야 하는 보스니아 아버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딸은 “아버지, 왜 나를 버렸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요컨대, 그리스도가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할 때, 사실상 죽음을 맞는 것은 절대적인 무능함을 드러낸 성부이며 그는 곧이어 성령의 모습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보스니아 내전을 치르면서 그가 겪었을 그 절망의 심연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가 목격한 것은 바로 신의 무능 아니었겠는가. 회의 없이 안착한 믿음이란 믿음이 아니다. 부인해 보고 부인해 보고 그래도 부인할 수 없을 때, 그게 믿음이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러한 회의懷疑의 바다를 건넜기에―그렇다. 바다다. 끝없이 막막한 바다. 깊고 깊은 추락의 바다― 그 나락의 바다에서 갑자기 육지가 솟아오른다. 절대믿음의 육지. 그것을 기적이라는 말 말고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거기에서 예수는 절대믿음의 결단의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 순간에 크리스트는 탄생한다. 크리스트는 에루살렘의 구유통에서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말을 하자. 성격을 설명하는 우리는 이 순간을 크리스트로서의 성격의 획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격을 획득하지 못한 인물은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며 인물이 성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텍스트 속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야 하며, 사는 것이란 회의하고 갈등하는 삶의 진면목을 재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필은 텍스트 안에 생생한 인물을 담아내는 것마저 주저했다. 작가 자신으로 간주되는 화자 혼자만이 웅얼웅얼 중얼거리다가 별 것도 아닌 것에 과도하게 깨닫거나 감동하다가 끝나곤 했다. 그러니 텍스트의 안의 세계는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이제부터라도 수필이라는 텍스트 안을 풍요롭게 살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인물이 살아야 하고 그들이 성격을 획득해야 한다.

아둔한 나에게 맨 처음으로 수필에서 성격을 논할 수 있도록 좋은 텍스트와 기회를 제공한 이 책의 저자 윤상기 선생께 감사드린다. 첫 수필집을 낸다고 희망에 부풀어 나에게 평을 써달라고 왔던 그날의 그가 생각난다. 사양했다. 그러자 그는 일단 과거의 원고를 정리하고 다시 출발하려한다고, 그러니 그 어떤 비평도 달게 받겠다고, 혹독한 비평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쓸 수 있겠다고 했다. 사실 나는 말이야 그리 했지만 그를 알게 되면서 그의 성실한 삶의 태도에 감탄하고 절로 존경했던 바라 글을 쓰기 시작하면 멋진 찬양의 글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원고는 지체되고 지체되었다. 내가 변해 있었다. 소모적 글을 다시는 쓸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드디어 성격에 대한 논문을 쓰고 말았다. 그는 기꺼이 그 원고를 받아들였다. 이런 인연으로 누구보다도 먼저 그의 수필에서 성격을 획득한 인물들이 창조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해 본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우린 그런 징후를 그의 텍스트에서 확인하지 않았는가.

http://www.saemga.com

위의 글을 쓰신 김종완님(수필가·평론가)이 지도하시는 시민대학에서 9월부터 매 주일에 한 차례씩(약 2시간) 진솔하고 짜임새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수필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천사홈 <아름다운 수필>난에 여러 수필가의 글을 소개하고 틈틈이 부족한 대로 제 글과 천사홈에 올리기 원하는 분들의 글을 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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