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

by 이재섭 posted Oct 2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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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epress.kr/기독교개력신보 2016/10/18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

< 김영규 목사 >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신자들은 비복음적인 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 가지고 있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무오한 진리로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되 그 권위가 인간에게 의존하거나 교회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오직 성경에 따라 자연 속에 있는 자유에 대한 강조가 고백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택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그 방식 혹은 길에 대한 고백에 앞서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고백이 하나의 장으로 고백되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보존에 대한 고백과 은혜와 구원의 보증에 대한 고백 이후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에 대해서 은혜 아래 중생된 자들의 경우 더 강화된 성격을 강조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에 이어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고백이 뒤따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옛 교회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들, 즉 그의 행위들과 고난들 및 은택들을 예표하는 규례들인 의식법에 대한 폐지와 정치적 집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재판법의 만료를 담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고백도 담겨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도덕법으로서 율법과 관련해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된 자들에게 성경에 따라 더 강화된 그런 고백 조항에 이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논리적으로 종속될 수 없을 것 같은 예배와 안식일에 대한 고백, 법적 맹세와 선서에 대한 고백, 관원에 대한 고백 및 결혼과 이혼에 관한 고백 등이 그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고백 조항들에 일종의 저항 정신을 담고자 하는 면이 있다.

   그와는 상관이 없다 할지라도,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 이후에 이미 작정과 예정에 대한 고백에서 분리될 수 없는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져 있는 택자들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백들이 순서 상 자유 의지에 관한 고백에 종속이 되어 있다는 입장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에 대한 고백의 제1항 안에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이 포함이 되어 있다는 점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시편 115편 3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가장 자유롭다고 하면서 그 자신의 의지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논의에 의해서 일어날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영원 전부터 결정하였고 그의 의지의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서 그의 영광을 위한 모든 수단들도 미리 정하였지만, 그 결정에 있어서 피조물들의 의지에 어떤 폭력이 제공된 일이 없고 두 번째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도 없애버리는 일이 없는 방식이었음을 처음부터 정의해 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섭리도 첫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과 관계해서 모든 것들이 불변하고 틀림없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제2 원인들의 본성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혹은 자유롭게 혹은 우연하게 일어나도록 질서화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 상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란 그 핵심으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라는 고백에 근거해 있으며 반대로 이것은 기독교 자유의 가식아래 양심의 참된 자유를 배역하고 기독교 자유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어떤 점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의 교리들이나 명령들에 저항하는 데 있다.

   그런 기독교 양심에 의한 저항의 내용에 맹목적 신앙이나 절대적이고 눈먼 순종의 요구로부터 자유를 포함하지만, 훨씬 깊게 유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택자들이 값없이 자유롭게 의롭다고 여겨지는 일이란 단지 그들의 죄들이 용서되는 방식이 아닌 마치 의가 부어지는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할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 때문이 아닌 그들 안에 일어나거나 행해진 어떤 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든지, 혹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의 전가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자신의 의로서 신앙 자체나 신앙 행위 혹은 어떤 다른 복음적 순종의 전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일체의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고 쉬는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런 고백들과 함께 극히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양심 자체는 비 복음적인 일들에 대하여 이미 저항의 근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조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놀라운 강조도 아직 고린도전서의 초반 논증들이나 로마서 전체에서 보여준 사도 바울 자신의 실제적인 강조의 방식에 여전히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오래된 순수한 저항 정신은 실로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최소한 그런 고백들과 사도 바울과 같은 진리를 가진 자로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 개인들은 과학과 그 기술들이 그 합리성으로 대표되어 가고 있는 미래 사회에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점점 더 심하게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성장과 함께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저항하는 양심 뒤에 가식과 더불어 숨어 있는 더 본질적이고 더 큰 허무주의가 점점 크게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는 언제든지 돈이나 물질로 오염된 국민 개인의 신앙 자유를 세법개정으로 압박해 오는 국가적 통제나 감시자로서 실제적으로는 부패의 덩어리이요 원상인 기관장들에게 더 힘을 싫어주고, 오히려 이제 가냘픈 서민의 양심까지 그들에게 다 맡겨야 하는 현실적인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주는 압박보다 더 좌절되게 하는 힘의 깊은 원천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구 환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밀려오는 피해들보다 더 큰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할 내용으로 인한 그런 짐이 더 무거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로만 위로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여전히 마지막 위로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면, 피눈물이 나는 눈물을 닦고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임을 믿으며 그런 내적인 무서운 회의주의와 허무주의를 참아내어 끝까지 하나님이 바로 진정 그들의 보상이요 영광임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힘은 여전히 부활과 그 영광에 이르기 전에 그와 같은 일을 증명해 내는데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