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사랑한 개척 선교의 시조' 데이빗 리빙스턴

by 이재섭 posted Oct 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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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리빙스턴은 일반인들에게 지리학자요

탐험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선교에 헌신한 선교사

였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과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 1855년 11월 15일, 리빙스턴이 처음 발견한 "빅토리아 폭포"



그는 스코들랜드의 불란타이어에서 1813년 3월 19일 낮은 신분인 부모 사이

에서 태어났고 매우 가난했다.
그는 디크의 '종교철학과 미래국가의 철학'이란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됐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자기 직업의 장래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방적공이 되어 어느 정도 많은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 의료선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은 그러한 일이라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이런 목표를 마음에 품고서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고래스고우에 있는

앤더슨 대학에 들어갔다.
의학공부를 시작하면서 한편으로 리빙스턴은 런던선교회에도 지원을 신청해

놓았다.
그는 수습생으로 받아들여져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840년 리빙스턴은 의학공부를 마치고 핀스베리의 알빈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 때는 이미 영국과 중국 사이에 아편전쟁이 발발해 있었고 런던선교회는 전쟁

이 끝나기까지는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스도를 만난 열정은 곧 다른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펫을 만난 것을
계기로 남아프리카를 위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됐다.



리빙스턴은 12월 조오지호에 승선해 남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리빙스턴은 세츠와나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의 선교를 시작하기에

적합한 곳을 찾기 위해 곧 케이크를 떠났다.
그는 북쪽으로 길을 떠나 쿠루만과 츠와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쿠루만을 건설한 로버트 모펫은 20년 동안 선교에 힘써왔다.

도착한 리빙스턴은 인구가 많고 회심자가 많은 번영하는 마을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실망하고 말았다.
그 땅은 거의 황무지였으며 한발의 피해를 입고 있었고 관목에 덮인 땅이었다.
종교적 상황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리빙스턴은 많은 현지인들이 기독교를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립된 부족들에게 유럽인들은 이상하게 보였고 설교자들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사람들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 리빙스턴은 머리를 낮추고 기도했는데,

이것을 본 그들은 그의 신이 땅속에 있다고 생각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12년 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회심자 밖에 얻지 못한

데이빗 리빙스턴은 점점 더 정규적인 선교사역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문호가 열려서 유럽인들이 여행할 수 있고 쉽게 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아프리카인들은 먼저 유럽의 방식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

이며, 자신들의 관습을 버리고 서구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더욱 바라게 될 것

이다.
그는 “기독교, 무역, 개화”를 불가불리의 것으로 보게 되었다.

리빙스턴은 가족들을 배에 태워 영국으로 보냈다.



잠베시강은 오늘날의 잠비아에서 발원하여 앙골라 동부를 통과한다.
그리고 남동쪽으로 잠비아와 모잠비크를 가로질러 아프리카 남동 해안으로

빠져나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준비해두셨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때부터 리빙스턴의 삶은 아프리카를 기독교 선교에 개방시켜야 한다는

집념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다.
그는 4년 간 탐험되지 않은 지역으로 4,000마일을 여행했다.
짐베시 북방 탐험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그는 거의 항상 질병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의 의지력은 많은 그의 동료들을 앗아간 질병이나 불편함에

굴하지 않았다.



4년 간의 아프리카 횡단을 마친 리빙스턴은 고향에 돌아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받은 수많은 영예가운데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받은 법학 박사학위도

들어있다.
그는 재빨리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1857)이란 책을 썼는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여러 얼굴은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의 일을 하나님께서 관장하신다는 칼빈주의적인 신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확신했고 한마음으로 그것을

추구해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극심한 고통과 불편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 봉사를 받으셨다면 내 인생은 나의 사역이 끝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리빙스턴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항상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계획은 한 사람의 인생보다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본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영국이 아프리카에 대해 “신성한 소명”이 있다는 그의 말은,

그가 원했던 대로 선교사들과 제국주의 양자에게 도전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그의 선교적 자세는 적극적이고 개척자적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수천의 마을들"에 대한 부담을가진 개척 선교사였다.



이에 대한 유명한 예화로 어느 날 영국에 있는 몇몇 친구들이 리빙스턴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리빙스턴, 낯선 땅에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자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네. 먼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네를생각하면 여기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네.

그래서 자네의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우리가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몇 명 그곳으로 보내려 하네. 그러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상세히 적어 다음 편지

에 보내 주면 좋겠네."



하지만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했다.



"마음은 고마우나 이곳까지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이곳에서 진정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스스로 찾아오겠다는 사람이거든."

선교사로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아프리카의 길을 연 것이다.


그가 만든 지도를 따라 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873년 5월 1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개척자적인 삶은 지금의 아프리카에

위대한 복음의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결과를 낳게 한 위대한 인물로서 평가되고

있다.

http://cafe.daum.net/worldclle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