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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2007년은 한국 교회 선교 운동사에서 한국 장로교회가 1907년 이기풍 목사를 제주 선교사로 파송한 100년을 기념하는 해인 동시에, 한국 교회사에서 평양 대부흥(revival) 혹은 대각성(awakening) 운동 100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장로교회는 이기풍에 이어 1909년 최관흘 목사를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경에 파송했고, 1910년에는 백만명 구령 운동의 연장으로 김영제와 김진근 두 목사를 만주 간도 지방으로 파송했다. 1912년 총회 조직을 기념하면서 1913년 한국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수한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중국 산동에 3명의 선교사 가정을 파송했다. 이처럼 초기 한국 교회의 복음 전파 열정은 한민족의 경계를 넘어 해외 선교의 영역까지 확장되었고,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적 교회로 성장해 왔다. 현재 한국 교회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이 되었다.1)
1932년 미국 하버드 대학의 윌리엄 혹킹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미국 여러 개신교단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미국 개신교 선교 100년을 맞아 지난 1세기 동안 진행되어 온 해외 선교를 재고(再考)하고, 새로운 선교 방향을 제시했었다.2) 같은 방식을 좇아서, 이 글에서는 1907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 출범과 함께 타문화권 선교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제주도 선교, 산동 선교, 1909년 한인 동포(디아스포라) 선교로 추진되었던 일본 선교, 블라디보스톡 선교부터 해방 후 1956년에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사로 최찬영, 김순일 목사가 태국으로 파송되기까지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 파송 100년의 전반기 역사를 개관한다.3) 이어서 이러한 한국 교회의 선교적 시도가 오늘의 한국 선교계에 주는 선교사(宣敎史)적 교훈과 의미를 모색하고자 한다.


II. 외지 타문화권 선교

초기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 역사는, 1902년 인천 내리 감리교회의 하와이 선교를 시발점으로 중국 산동,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의 한인 이주민과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 설립과 외국인 선교 활동의 형태로 추진되었다.4) 연대기적으로는 내리교회 교인이 주축이 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의 신앙 지도를 위해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한 1902년이 한국 교회 해외 선교의 시작이 된다.5) 하지만 이는 한국(동일 문화권)에서 이민 간 교인들에 대한 개교회의 목회적 차원에서 수행된 지교회 개척이기 때문에 한국 교회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 사역으로 볼 수 없다. 따라서 본격적인 교단 차원의 선교 활동은 1907년 한국 장로교 독노회에서 추진된 제주도 선교(유사 문화권)와 1912년 장로교회 총회 창립 기념으로 1913년부터 전개된 중국 산동 선교(타문화권)를 실질적인 해외 선교의 시작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6)

A. 제주도 선교(1907-1930)
1907년 미국 남북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의 4개 선교부가 한국 장로교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했다. 독노회 창립과 함께 한국 교회가 단독으로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사 파송을 결의한 것은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었다. 1903년 겨울부터 원산을 기점으로 평양, 서울, 목포, 송도 등지에서 일어나던 부흥이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된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 기간에 촉발되었고, 특히 1월 14일-15일의 마지막 이틀 동안 평양의 4개 교회 연합 특별 저녁 집회 중에 부흥 운동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7) 이후 평양 대부흥 운동은 길선주 목사가 서울과 전국을 다니며 기도회와 부흥 집회를 인도하여 한국 교회 안에 널리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대부흥 운동의 전국적 확산의 중심에 서 있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9월 17일(화) 독노회가 조직되고, 새로 임직받은 7명의 목사 중 1명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8)로 파송하기로 결의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9)

1. 제주에 선교사를 보내어 전도를 시작할 일, 2. 선교사의 월은과 전도 용비는 각 교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연보하게 할 일, 3. 연보할 때는 각 교회에서 연보할 편지 보는 주일에 광고하고 그 다음 주일에 연보할 일, 4. 제주 선교사는 이기풍 씨로 전도인 한두 사람과 동반하여 파송할 일,… 7. 제주 선교사와 전도인 월급 밖에 내왕비와 가사비와 전도회 인허 특별비를 본 전도국에서 지출할 일(원문의 고어체를 현대어로 약간 수정함).10)

즉 제주도 선교와 관련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선교 사업 추진 방안이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기풍 선교사의 월 생활비(月銀)와 사업비와 선교비는 전국의 모든 장로교회의 선교 헌금으로 모금·충당하고, 제주 선교를 위한 특별 헌금은 한 주일 전에 광고하고 다음 주일에 헌금하도록 했다. 특이한 점은, 외국 선교 자금의 도움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자립 선교(self-supporting)를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선교사 이외에 1-2명의 전도인을 조력자로 파송하고, 선교사와 전도인의 오고가는 교통비와 가사비와 특별히 허락받은 비용은 전도국에서 지출토록 했다.11)
1907년 독노회 전도국 위원 블레어(배위량, William N. Blair) 선교사가 "새로운 한국 교회의 첫번째 모임(獨老會)은 사실상 선교사를 파송하는 모임"12)이었다고 증언했듯이, 첫 독노회 모임은 온통 선교적인 분위기로 충일했다. '조선어 공의회' 회장(1906-1907년)인 유진 벨(배유지, Eugene Bell) 선교사가 사도행전 1:8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께서 마지막 분부하신 대로 증인"이라는 제하로 설교했다. 독노회는 먼저 '전도회'를 '전도국'으로 개칭하고, 장로교회 조직 후 첫 노회의 제일 중요한 안건으로 제주 선교사 파송 건을 심의·의결했다.13)
초기 한국 교회에 관한 많은 기록을 남겼던 클라크(곽안련, 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는 한국 교회의 제주도 선교 사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 조선 장로교회는 설립 당초부터 전도인과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이다. 우리 교회가 1907년에 타국 교회의 관리를 떠나 자치(自治) 교회가 된 것은 자타가 공축(共祝)할 특기의 사실이다. 전국 교회는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전력을 기울여 큰 연보를 하여 제주도로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작정하고 7인밖에 없는 목사 중에서 이기풍 목사를 외지에 있는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내놓았다."14)

곽안련 선교사가 초기부터 자급(自給)·자전(自傳)하는 교회로 성장해 온 한국 교회가 1907년 독노회 출범과 제주도 선교를 기점으로 하여 자치(自治)하는 교회가 되었다고 밝힌 점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15) 이는 19세기 중반 영국 교회 선교회(CMS) 총무 헨리 벤(Henry Venn)과 미국 회중교회 선교부 총무 루퍼스 앤더슨(Rufus Anderson)이 선교의 궁극적 목표가 삼자 원칙에 근거한 현지 교회 설립이라고 주창한 이후 세계 선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토착 교회론에 의하면, 이제 한국 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홀로 서기 시작한 것이다.
1907년 대부흥 운동의 결과 한국 교회는 영적 힘을 얻고 그 기세로 국내 전도와 외지 선교까지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장로교회의 노회가 조직되면서 첫 사업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외지 선교를 시작하였다. 특이한 점은 당시 20여 만의 인구가 살던 제주가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언어와 풍습과 문화가 많이 다르고, 그 때까지 개신교 전도자가 간 적이 없었기에 제주도 사역을 외지(해외) 선교로 간주하였던 것이다16).
1908년 이른 봄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로 이주하여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후 이기풍과 협력하여 일할 1-2명의 전도인을 파송하기로 의결한 1907년 독노회의 결의에 따라, 남녀 전도인이 제주에 파송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08년 남전도인 김홍련이 파송되었고, 1908년 9월 제2회 노회에서 이기풍과 함께 김홍련이 제주도 사역을 보고하였고, 제주 선교 소식을 교계 신문에 게재하도록 결의하였다. 또한 노회 전도국은 제주 선교 사역을 더 확장시켜 나가기로 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제주 여성들을 위해 여전도인 한 사람을 파송"하기로 가결하였다.17)
그리하여 당시 자유로이 외출할 수 없고 '남녀 칠세 부동석'의 관습에 사로 잡혀 있는 여성들에게 개인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1909년 평양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이선광 여전도사를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여 여러 해 동안 이기풍 목사를 돕게 했다. 그녀는 여전도회가 파송한 첫 선교사가 되었다.18) 이기풍이 1911년 노회에 제출한 제주 선교 보고에 의하면, 평신도 김창문이 6개월간 전도했고, 평양 숭실대 기독학생회의 후원으로 김형재를 제주에 파송하여 전도케 했고,19) 미국 남장로교의 매큐첸(마로덕, Luther O. McCutchen) 선교사의 부인은 개인 헌금으로 여전도인 2명을 보내어 전도하게 했다. 이처럼 열심히 전도한 결과 1908년에 20여 명에 불과하던 교인 수가 1911년에 410명으로 증가하였고 3개 교회가 설립되었다.20) 이후 1912년 제주 선교를 위해 한 명의 조사와 수 명의 남녀 전도인이 더 파송되었고, 1913년 제주 선교는 날마다 성장하고 있으며 매서인 1인을 고용할 계획임을 밝힌다. 이후 이기풍은 1915년까지 제주도에 1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21)
이기풍 목사와 이선광 여전도사, 여러 남전도인 등 전국 교회의 헌금과 기도 그리고 평양 여전도회와 평양 숭실대학교 학생 등의 연합 사역(team ministry)을 통해 제주 선교는 초기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였다. 이후 1913년 한국 장로교회가 순수한 해외 선교인 중국 산동 선교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제주 선교는 '내지 전도'로 간주되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전라노회가 맡게 되었고, 1917년 전라노회가 전북노회와 전남노회로 분립되면서 전남노회가 제주 선교를 전담하게 되었다.22) 이후 1923년 봄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10일간 대전도 집회를 열었고, 1922-1924년에는 여름 방학 중 숭실전문학교 학생 전도대의 대대적인 전도 집회 등을 통해 계속 성장하였다. 이기풍 목사가 사역을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난 1930년 11월 17개 교회가 개척되어 전남노회에서 분립되고 제주노회가 독립노회로 조직되었다.23)

제주도 선교의 의의
첫째, 제주 선교는 1903-1907년 어간에 촉발된 대부흥 운동과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표출된 한국 교회의 선교 행전의 시발점이었다. 즉 부흥 운동의 불길이 제주 선교까지 확대되어 나갔던 것이다.
둘째, 제주 선교는 한국 교회가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24)라는 선교적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1907년 독노회 설립과 함께 한국 장로교 최초로 임직받은 7명의 목사 중 1명을 선교를 위해 따로 세워 안수한 후 하여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사로 제주에 파송했다.
셋째, 당시 한국 교회는 선교를 한국 교회 전체에 주신 사명으로 이해했고, 제주 선교의 모든 비용을 외국 자금의 보조 없이 온전한 한국 교회의 헌금으로 감당했다. 제주 선교는 몇몇 교인이 아닌 한국 장로교 산하 모든 교회가 헌금을 드려 참여한 사업이었다. 제주 선교는 향후 한국 교회가 해외 선교비 일체를 스스로 감당해 나가는 자립 선교의 원년이 되었다.
넷째, 제주 선교를 위한 선교비 후원 창구가 독노회 전도국으로 일원화되어 있었다. 전도국이 선교사 인선, 선교비 모금과 후원, 후속 선교 인력 파송 등의 모든 총체적 지원을 했다. 또한 선교사는 전도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매년 노회 회기(會期) 때마다 전도국에 사역 보고를 하고 교계 신문에도 선교 소식을 게재하였다. 또한 전국 교회의 연보(捐補), 즉 특별 선교 헌금으로 모금된 선교비에서 선교사의 생활비, 사역비 그리고 교통비, 가사비 등이 지원되었다.
다섯째, 안수받은 목사 선교사뿐 아니라 남녀 전도사, 조사, 평신도 남녀 전도인, 매서인(賣書人), 학생들의 협력 사역과 팀 선교(team mission)가 이루어졌다. 즉 장로교회의 전도국뿐 아니라 평양 여전도회·숭실전문학교·고등학교 기독 학생회까지 선교에 참여했다.
여섯째, 여성 사역을 위해 독신 여선교사를 파송했다. 평양 여전도회가 이른바 '여성을 위한 여성 사역'(woman's work for woman)을 위해 제주에 여전도사를 선교사로 파송했다.25) 이로써 여전도회 전국 연합회가 보조(auxiliary) 선교사 파송 기구로서 남성 주도의 장로교 총회 선교사 파송 기구인 전도국과 협력하여 선교사를 파송·후원하는 협력 사역의 선례를 마련했다.26)

B. 산동성 선교(1913-1957)27)
1907년 독노회가 창립된 이후 교회는 국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07년 독노회 창립시에 제주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노회 설립을 기념한 한국 장로교회는, 1912년 9월 장로교 총회를 창립하면서 그 기념으로 복음의 역사가 더 오랜 중국 산동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28) 1912년 및 1913년 총회는 전국 교회가 매년 추수 감사 주일을 선교 주일로 지키고 그 헌금을 해외 선교비로 충당할 수 있도록 전도국에 보내도록 하였다.29) 또한 1913년 총회는 중국에 파송되는 선교사는 "자유 교회를 설립하지 말고 현지 장로회와 연합할 것"이며 귀국 시에는 언권 위원(방청원)으로 총회에 참석하도록 결정했다.30)
한국 선교 역사에서 제주 선교가 국내에서 시도된 첫번째 타문화권 선교였다면, 한국 교회가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외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한 첫번째 예가 중국 산동성 선교였다. 미 북장로교 선교사 클락(곽안련, Charles A. Clark)은 한국 교회 중국 산동성 선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1912년 전국 내 7노회를 포함한 조선총회가 창립되었다. 이 경하할 만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전국 교회는 대연보를 거출하여 3인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교회가 선교 받은 지 28년밖에 안 된 때였다. 실로 세계에 유(類)가 없는 경이적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랴.31)

산동 선교를 위해 총회는 선교사 파송 전에 현지 답사를 하고, 선교지 선정을 위해 중국 교회뿐 아니라 재중(在中)·재한(在韓)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협의를 거치는 등 사전 준비를 거쳤다. 물론 제주 선교 경험도 귀중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독노회 창립부터 창립 총회(1907-1912)까지 전도국 위원장인 길선주 목사는 여러 해 전부터 중국 선교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32) 또한 블레어(William Blair) 선교사에 의하면,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자는 안이 여러 해 동안 청원되었고 1912년 한국 장로교 총회가 중국 내 선교 지역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1912년 장로교 총회가 조직되고 선교사 파송이 거론되면서 총회 전도국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 헌트(한위렴, William B. Hunt)로 하여금 선교 가능 지역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헌트는 중국을 방문하여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사 파송 문제와 사역 가능 지역을 오랫동안 조사했고, 중국 교회의 지도자와 중국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나 이 문제를 협의했다. 이후 그는 귀국하여 중국 교회가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 계획을 환영한다는 보고를 총회에 제출했다.33)
1912년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중국 선교를 결의하고, 1913년 윌리엄 헌트 선교사가 산동 방문을 통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이와는 별도로 장로회 총회는 선교 현지에 있는 중화 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華北大會)34)와 협의를 통해 '선교지 허가'를 얻기 위해서 2명의 한국인 목사를 파견하였다. 1913년 5월 재령의 박태로

목사와 안주의 김찬성 목사는 산동 노회에 파견되어 시찰한 후, 9월 총회에 '산동성 회양현과 래양현 등지'를 선교 구역으로 정했다고 보고했다.35)
또한 래양에서 선교하고 있던 산동 주재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선교부가 사용하던 소유지를 한국 선교부에 이양하고 다른 지역으로 철수하겠다고 제안했다.36) 한국의 두 목사가 산동을 방문한 때는 마침 3년 만에 1차씩 있는 화북대회가 개최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총회가 파견한 2명의 목사는 조선 교회의 산동 선교를 화북대회에 제출하였고, 유력한 대회원의 반대 의견도 나왔으나 이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화북대회는 만장일치로 조선 교회의 산동 선교를 허락하였다.37)
이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조직되어 있는 현지 교회와 선교사들과 무관하게 선교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다. 장로교 총회는 선교지 선정의 문제를 현지 미국 선교사들과 중국 장로회 대회의 교회 지도자들과 사전 협의하고 허락을 얻은 후에 선교사 파송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선교부가 제의하고 중국 교회의 동의를 얻어 공맹(孔孟)의 출생지인 중국 산동의 래양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할당받았던 것이다.38)
한국 교회가 산동성 래양현을 첫 해외 선교 구역으로 제안한 이유는 이곳이 오지(奧地)이며, 1900년 의화단 사건의 반(反)외세와 반기독교 투쟁을 주도한 자는 산동성 사람들이며 산동 지역의 선교사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천주교, 미국 남침례교, 독일 루터교, 미국 북장로교 등 여러 선교부가 산동에서 사역하고 있었지만 주로 도시에 집중하였고 선교의 열매도 미미하였다. 특히 산동은 1862년부터 50여 년 간 사역하던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유일하게 선교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곳이기도 했다.39)
1913년 11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3명의 목사 가정이 최초로 산동에 파견되어 사역하기 시작했다.40) 래양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중국인 가옥을 빌려 살면서

중국말을 배우며 선교하기 시작하여 2년이 채 안되어 3명에게 세례를 주었다.41) 그러나 이러한 선교 보고를 한 지 1년도 채 안 된 1916년 5월 박태로가 질병으로 귀국했고, 파송 3년 6개월만인 1917년 4월 김영훈, 사병순도 큰 흉년과 생활비와 사역비 부족과 자녀 교육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총회 "전도국 허락 없이" 선교지를 떠나 귀국해 버렸다.42)
파송된 지 3년 어간에 산동 선교사 모두가 철수하자, 1917년 5월 7일 총회 전도국은 질병 치료차 귀국해 있던 박태로 선교사와 방효원 목사를 임시로 산동에 파송하여 산동 선교를 돌보게 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박태로 선교사가 중병으로 다시 귀국하고 중국어를 못 하는 방효원 목사만 남게 되자, 6월에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선천의 김병규 조사를 급히 파견하여 그를 도와 중단 위기에 처한 선교 사업을 돌보게 했다.43) 8월에 귀국한 방효원은 9월 총회에서 산동의 선교 상황을 보고했고, 총회는 3명의 선교사를 새로 파송하기로 하고 1917년 10월 방효원, 홍승한 목사를 먼저 파송함으로써 산동 선교는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었다.44) 이들은 셋집에 잠시 살다가 1918년 1월에 전도국에서 구입해 준 가옥으로 이주했고 처음 3년간 중국말을 배우며 틈틈이 전도했다. 같은 해 2월 김병규는 8개월간 임시 전도인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귀국했다.45)
1917년 10월 재개된 산동 선교는 추가 선교 인력 파송과 김윤식 등 평신도 의사의 자발적인 선교 사역 참여와 더불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1919-1920년에 폭발적인 성장을 보였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성장했다. 1918년 11월 박상순 선교사가 증파되었고, 전도 사업과 함께 절실히 필요로 하던 의료 사업이 병행되었다. 즉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김윤식 의사가 박상순 목사 가족과 함께 산동 선교지에 들어가 협력했다.46) 그는 총회와 무관하게 래양에 가서 '계림의원'을 개원하여 자비량(무봉급으로)하며 선교 사역을 크게 도왔다. 그는 선교사로 파송된 것은 아니지만,47) 가난한 현지인들을 무료 치료하고, 교회 서적을 반포하고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복음에 수용적인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48) 그리하여 이 병원은 개원 초기부터 "조선 장로회 선교 병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49) 이후 1923년에 주현칙 의사가 즉묵으로 가서 병원을 개원하고, 1932년에는 안준호 의사가 개원하여 선교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50)
한편 1913년 총회에서 선교사는 현지 노회에 소속되고 별도의 교회를 세우지 않도록 하고 선교사는 언권 위원(방청원)으로 허락한 이후, 1916년 총회는 재차 선교사는 중국 교회 이명을 허락하고 귀국 시에는 총회의 회원이 됨을 결의하였다.51)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1918년 5월 화북대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래양성 주변 12km 지점을 선교 지역으로 인수했다.52) 한국 선교사들은 산동노회에 속하여 노회의 지교회로 교회 개척을 하였고, 별도로 한국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 사업을 진행하였다.
산동 선교가 확장되면서 한국 장로교 총회는 1919년 선교 지역 확장을 중국 산동대회(산동·요동노회)에 요청하였고, 11월 양 노회는 한국의 요청대로 래양 전 지역을 한국 선교 구역에 이양했다. 선교 구역의 확대는 미 북장로교 산동 지부 선교사들과 중국 노회원들과 협의하에 기쁜 마음으로 이루어졌다.53) 이 시기에 산동 선교는 선교 지역이 확대되고 그 지역 내 미 북장로교가 세운 교회들을 인수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했다. 이후 1921년 11월 산동·요동노회에서 미 북장로교 선교부, 요동노회와의 합의로 산동성 즉묵 지역이 한국 선교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1922년 6월 총회는 이대영 선교사를 산동 래양으로 파송하였다. 1922년 9월 산동 선교 구역이 확대되면서 래양과 즉묵의 두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하지만 1924년 9월 총회의 선교 예산 축소로 인하여 한 차례 타격을 입는다. 그 여파로 즉묵과 래양 두 선교부가 하나로 병합되고 즉묵의 홍승한, 이대영 선교사가 철수하고 방효원은 래양에 그리고 박상순은 래양에서 즉묵으로 이주하는 등 선교 인력의 구조 조정으로 이어졌다.54) 또한 운영하던 학교 보조비 삭감 조처로 인하여 학생 수가 감소하고, 자급 정책의 강화로 교육 분야는 점차 쇠퇴하다가 1936-1938년에 학교 교육은 중단된다. 1931년 여전도회는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여선교사로 김순호 여전도사를 산동 선교사로 파송했다.55) 꾸준한 성장을 보이던 한국 선교는 1933년 5월 새로운 노회, 즉 래양노회를 조직함으로써 중화기독교회 산동대회 내에 하나의 노회로 자리하게 되었다.
1930년까지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어 가던 산동 선교는 1931년부터 정체기에 접어든다. 이는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37년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산동을 둘러싼 항일 전쟁과 대내외적인 정국 불안 상황 때문이었다.56) 1937년 전쟁 와중에 박상순, 이대영, 김순호가 귀국하였고, 1937년 파송된 방지일은 산동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도 지역을 맡게 되었다. 1940년 이후 이대영, 방지일 두 선교사가 잔류하여 교회를 돌보다가, 1948년 이대영이 귀국하고, 1957년 방지일이 귀국함으로써 44년간 지속되던 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해외 선교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57)
제주 선교는 대부흥의 열기와 노회 기간 중 다소 감정적으로 들뜬 분위기 속에 갑작스럽게 시작되었지만, 총체적인 사후 지원으로 많은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산동 선교는 총회 전도국의 보다 오랜 준비 끝에 추진되었지만, 박태로의 제1기 선교팀은 언어 습득, 전염병, 건강 악화, 충분치 못한 후원비, 선교사 자녀 교육 등의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철수하였다. 그러나 방효원의 제2기 선교팀은 초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방효원은 산동 선교의 선교사적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복음 발전사상(發展史上) 조선 교회의 산동 선교는 세계적 신기록을 작성하였다.… 피선교지인 조선 교회가 선교를 받은 지 25년 만에 외국에 선교하는 일은 현금 20세기 피선교국으로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 신기록이다.58)

산동 선교 정책과 의의
첫째, 산동 선교는 한국 교회와 한국 장로교회 선교 역사상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였다. 또한 이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선교의 시작이기도 했다.59) 생김새부터 중국인과 비슷한 한국 선교사들은 한자와 그 예의 풍속을 배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고, 중국 사람처럼 입고 먹고 자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결과 산동 선교는 서양 선교부처럼 많은 선교 인력과 재정을 투입하지 않고도 괜찮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60)
둘째, 산동 선교는 외국 선교 자금의 도움 없이 100% 순수하게 한국 교회 자력으로 선교 인력과 자원을 조달한 선교 사역이었다. 산동 선교의 모든 경비는 한국 교회의 감사 주일 헌금으로 충당되었다.61) 특히 해외 선교 사업이 재정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한국 교회 여성들의 선교비 후원이 큰 역할을 감당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62)
셋째,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의 전구(前驅)나 앞잡이로 추진되지 않았다. 1807년 영국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에 의해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이후, 특히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서구 기독교 열강의 강압에 의해서 마지못해 선교의 자유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입장에서 서구 선교는 '강토 침략', '경제 침략'의 제국주의적 세력 확장과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간헐적으로 발생하던 반외세 운동은 흔히 기독교 배척·타도, 선교사 추방·살해 등 반기독교 운동으로 확산되었고, 한때 서구 선교사가 내지(內地)에 거주할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희생자였던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 이러한 반감과 악감정을 갖지 않았고 혼란의 시기마다 한국 선교사들을 보호해 주었다.63)
넷째, 산동 선교는 한국 선교 역사상 최초로 의료 사역을 통해 복음 전파의 길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 산동 선교에서 바울의 선교단처럼 목사 선교사 간 협력뿐 아니라 목회자 선교사와 평신도(의료 전문인) 사역자 간 협력을 통한 팀 사역이 이루어졌다. 1913년 선교사 3가정이 파송되었고, 1917년 2가정이 선교팀으로 파송되었다. 또한 1919년 이후 자비량할 수 있는 3명의 의사들이 자원하여 한국 선교 지역에 병원을 세워 현지인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치료하여 복음에 수용적으로 준비시켜 주어 목사 선교사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섯째,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 전에(그리고 파송 후에도) 현지의 중국 교회와 산동의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 협의를 거쳐 선교 구역을 결정한 후 선교사를 파송했다.64) 즉 한국 장로교회가 산동 지방에 일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이 아니라 먼저 현지 중국 교회뿐 아니라 현지 선교회와 충분한 협의를 거친 후에 선교의 허락을 얻었고 합의에 의해 선교 구역을 분배받았다.
여섯째, 한국의 산동 선교사들은 파송되면서 현지 중국 장로교회로 이명(移名)했고 현지 노회에 소속되어 일했다.65) 이 경우 선교사는 파송된 후에 현지 교회와 교단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고, 현지 노회의 노회원으로서 현지 교회와 협의하에 선교를 수행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이후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 노회의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곱째, 한국 선교사들은 선교 현지에 한국의 교파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현지의 교단 교회를 설립했다. 그 이유는 1913년 9월 한국 장로교 총회가 산동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는 경우에 현지 교단과 상관없는 교회를 별도로 세우지 말고 그 교회의 소속을 중국 교회에 둘 것을 결의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후일 한국 선교사가 철수하는 경우에도 중국 교회가 계속하여 그 교회를 돌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사려 깊은 조치로 사료된다.
여덟째, 총회 외지 전도국(선교부)이 중심되어 모든 선교 사업이 수행되었다. 즉 각 노회나 여전도회는 전도국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해외 선교를 추진하였고 상회인 총회 전도국의 선교 정책이나 행정 지침에 순종하여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66) 특히 총회 전도국은 선교사 파송 전에 사전 답사팀을 보내어 총회에 보고하도록 했고, 파송 후에도 산동에 정기적으로 선교 시찰단을 파견하여 보고토록 했다.67)
아홉째, 산동 선교의 제2기가 시작되는 1917년부터 현지 언어 공부와 안식년 제도가 마련되었다. 총회 전도국은 1914년부터 선교사의 3년간 중국어 공부를 위해 어학 선생 월급을 별도로 지불했다.68) 1918년 총회 선교회 규칙에 의하면 선교사의 어학은 3년간 공부하는 것으로 하고 매년 1차씩 시행하여 전도국에 보고하도록 했다.69) 또한 1918년 총회가 제정한 선교사 안식년 규칙은 3년마다 5개월씩 안식하도록 했고, 1922년 개정된 규칙에는 5년 시무 후 1번의 안식년을 갖도록 했고, 1928년 변경된 규칙에는 만 7년에 1년의 안식년을 갖도록 했다.70)
열째, 타문화권 선교사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인 선교사 자녀(MK) 교육과 선교사 자녀 학교 문제가 대두되었다. 1915년 9월 총회에 참석한 김영훈 선교사는 선교사 자녀 교육 문제를 제기하며 총회의 조처를 요청했으나, 총회 전도국은 1914년부터 지불하기 시작한 선교사 자녀 교육비(자녀금) 외에 별다른 방안을 수 년 동안 마련하지 못했다.71) 그러다가 1919년 1월 선교사 아동 학교가 개교되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72) 이후 1922년 최초의 선교사 자녀 학교 교사로 조소임이 부임하여 2년 정도 사역했다.73)
마지막으로,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 교인들에게 한국 교회의 특유한 신앙 방식을 심어 주었다. 즉 중국 교회에 생소한 새벽 기도회, 주일 밤 기도회, 삼일 밤 기도회, 사경회, 개인 전도, 십일조·헌금하는 법,74) 주일 성수, 성경 공부 등의 신앙 전통을 중국에 소개하고 정착시켰다.75) 특히 한국에서 성공한 네비우스의 자급(自給) 원리76)를 처음부터 가르쳐서 산동 지역에 접목시켜 교회 건축, 교역자 사례비, 학교 운영 등의 상당한 재정을 중국 교회가 감당하도록 했다.77)


III.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

설립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준 한국 교회가 본토를 떠나 일본 동경, 중국 산동, 러시아 연해주, 만주 등지로 흩어진 한인 동포(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추진했던 선교 사역은 교회의 중요한 선교 활동이었다. 특히 1913년 순수한 해외 선교인 산동 선교가 시작되고, 1917년 제6회 장로회 총회에서 한인 동포 사역을 '전도,' 외국인 전도 사역을 '선교'로 구분하기 시작하면서78) 해외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가 점차적으로 해외 선교의 범주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인 동포 선교는 초기부터 한국 장로교회에 소속한 전 교회가 함께 감당했던 한국 교회 선교사(宣敎史)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A. 일본 선교(1909-1948)
1876년 '한일 수호 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의 문호가 개방되고 개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한국의 조정(朝廷)은 명치유신 이후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크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을 시찰하기 위해 1880년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후 일본 유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 정부는 우수한 청년들을 뽑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파견했고 양반집 자제들의 일본 유학생 숫자도 크게 증대되었다.79) 초기 한국인 유학생 선교는 주로 일본 주재 선교사와 일본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국내 기독교 청년 가운데 일본 유학생들이 증가하게 되자,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목회적 돌봄을 위해 1906년 8월 한국 YMCA는 일본 동경 유학생들에게 김정식 부총무를 파견하여 동경 YMCA를 창설하도록 했다.80)
이후 1908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정익노 장로가 일본 방문시 동경의 한국 YMCA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후 교회 설립을 제안하였고, 이 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재일 대한 기독교회 동경교회 설립이 추진되었다. 유학생 대부분이 장로교에 속해 있기에 교단은 장로교로 하기로 하고 동경 한국 YMCA 유학생들은 본국의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목사 파송을 요청하였다.81) 선교사 파송의 요청에 따라 1909년 9월 제3회 독노회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1907년에 안수받은 한석진 목사를 1개월간 단기로 파송하여 유학생 중심의 교회를 돌보게 했다.82)
1909년 10월 동경에 도착한 한석진은 일본 주재 초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헵번(James C. Hepburn) 의사와 일본의 우에무라 목사의 도움으로 셋집을 얻어 재일 대한 기독교 동경교회를 창립하고 예배를 시작했다.83) 이후 한석진은 귀국하여 1910년 독노회에서 일본 동경교회 설립과 신자들 형편을 보고하고 선교사 파송을 정식 청원하고, 총회 전도

국은 동경에 목사를 파송키로 가결했다.84) 이에 장로회 독노회는 박영일 장로를 '전도인'으로 파견하여 1910-1911년 2년에 걸쳐 7개월간 교회를 돌보게 했다. 당시 유학생들 가운데 158명의 교인이 있었고, 이들은 동경의 한국 YMCA 회관을 빌려 사용하였다.85) 1911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은 임종순을 담임 목사로 파송했다.
그런데 1911년 동경의 유학생 가운데 감리교 출신 유학생들은 따로 예배드리는 일이 있었고, 나아가 별도의 감리교회를 세우고 선교 사업을 따로 추진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86) 이로써 동경 내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제각기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으므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브루엔(부해리, H. M. Bruen)의 인도로 장로교 예배가 아닌 감리교인과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12년 8월 미 감리회와 남감리회의 두 선교부는 한국 장로교회에 동경의 선교 사업을 연합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다.87) 이 제안에 대해 1911년 9월 장로회 독노회는 동경교회 내의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의 공익"을 위해 길선주, 언더우드, 브루엔 3인 위원회를 임명하여 감리교회와 동경교회 문제를 상의토록 했다.88)
그 결과, 비록 장로교가 일본 유학생 선교 사역을 먼저 시작했지만 감리교와 함께 동경 연합교회를 장·감 연합으로 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1912년 장·감 연합 위원회는 일본 동경 연합교회 운영에 대해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합의에 도달했음을 총회 앞에 보고했다.

① 동경교회 명칭은 '연합예수교회'(Union Christian Church)로 하고, ②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 3인씩 총 6인의 위원을 택하여 3년 동안 교회일을 맡아 처리토록 하고, ③ 위원들은 목사를 택하여 2년간 목회하도록 하고, ④ 교회는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라 부르지 않고, ⑤ 장로교 총회와 감리교 연회는 매년 1인의 선교사를 임명하여 동경에 가서 교회일을 돌아보고 도와 주도록 하고, ⑥ 동경 유학생 교인이 귀국하면(비록 서울로 가더라도) 각자의 고향 교회가 속한 교파 교회 교인이 되고, ⑦ 모든 동경교회 경비와 월급은 장·감 교회가 반반씩 부담한다.89)

일본 유학생 선교는 어떤 특정 교파를 내세우지 않고 장·감 연합의 공동 사역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1912년 이후 장·감 교회는 교역자를 교대로 1-3년씩 교대로 파송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912년 장로교 선교사 주공삼이 파송되어 2년간 사역한 후, 1914년 감리교 선교사 오기선이 파송되어 3년간 사역했다. 이처럼 장·감 두 교회가 동경연합교회의 목회자를 교대로 파송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연합 사업으로 추진된 동경 선교는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90) 1913년 장로회 총회에 제출된 '일본 동경연합교회' 현황 보고에 의하면 동경 유학생 전체 500-600명 가운데 매주일 80-100명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91)
한편 1910년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이후 노골화되던 일제의 경제적 수탈로 인해 농지, 토지 등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수많은 한인들이 일감을 찾아 만주, 연해주, 그리고 일본의 고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관서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경부터 동경 이외의 지역에 대한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 때부터 일본 선교는 지금까지 유학생 위주의 선교에서 벗어나 재일 한국인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선교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각처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관서 지방의 경우, 1917년 고베 신학교에 유학중이던 정덕생 목사는 한인 노동자들을 위한 전도 사업을 시작했고, 1918년 고베와 요코하마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1919년 동경 YMCA에서 2.8 독립 선언문이 발표되었고, 1921년 오사카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일본에 유학 온 신학생들 중심으로 재일 한인 노동자(동포) 거주 지역에서 선교 활동과 교회 설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92) 1920년대에는 30만 명이 넘는 한국의 남녀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관서 지역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이처럼 일본 선교 사역이 확대되자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는 1927년 캐나다 장로회에 재일 한국인 선교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영(영재형, L. L. Young) 선교사가 일본에 파송되어 관서 지방 한국인 선교가 활력을 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경 이외에 오사카, 고베, 나고야, 교토, 나라 등지에 한인교회가 계속하여 설립되었다.93) 그 결과, 1934년 일본 현지에 재일 조선 기독교회라는 장·감 연합의 단일 교단이 창립되었고, 1938년 당시 일본 전역에 한국인 교인 3,000여명, 조직 교회 50여개, 한국인 목사 13명, 여전도사 20명, 외국인 선교사 6명, 그 외 여러 조사들이 재일 한국인 선교를 담당하였다.94)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재일 조선 기독교회는 재일 대한 기독교회로 개칭하고, 1958년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가입하였고, 이후 세계 교회와 연대하여 통전적인 선교를 전개하고 있다.

일본 선교의 의의
첫째, 일본 선교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교파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확장에 있음을 국내외에 보여 준 선교 신학적 중요성을 지닌다. 즉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는 일본 동경에 각기 별도의 교회를 세우지 않고 교파를 초월하여 하나의 연합 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여러 한인 동포 교회가 있었지만, 이 모두는 본국의 교파주의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파 교회였고 연합교회는 그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95) 동경교회는 최초의 한인 동포(디아스포라) 연합교회였다. 참고로 1905-1910년 어간에 장·감 두 교파는 한국에서 하나의 개신교회('대한예수교회')를 세우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교지 일본에서 장·감 양 교회는 단일 개신교회('연합예수교회') 설립에 성공했다. 이는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부분이 선교 현장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史實)을 기억나게 한다.96)
둘째, 일본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해외에서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가 교파의 장벽을 뛰어넘어 추진한 에큐메니칼 협력의 첫번째 사례였다. 동경 유학생 사역은 한국 장로교 독노회가 주도권을 쥐고 시작했지만, 장로교의 양보로 1912년 이후 장·감 연합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관서 지방 한인 동포 선교를 감당했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영(L. L. Young)은 일본에서의 장·감 연합 사역은 "쌍방 모두가 보여 준 훌륭한 협력 정신"(spirit of co-operation)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97) 장·감 선교부가 보여 준 연합과 협력으로 인해 일본 선교는 한 나라에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선교 사업의 중복 투자, 선교비 낭비, 선교회 간 경쟁과 갈등, 교인이나 교회 일군 빼가기 등의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셋째, 일본 동경 유학생 선교는 2-3년간 특별 임무를 담당할 수 있는 단기 선교사의 발굴과 활용이 필요함을 인식시켜 주었다. 한국의 장·감 두 교회가 교대로 목회자를 파송한 동경 연합교회의 선교 사역은 특정 사역, 즉 유학생 혹은 이민 목회 사역에 있어 장기 선교사뿐 아니라 단기 선교사도 파송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 사례였다. 장·감 연합 사역 이전인 1909년 한석진 목사는 장로교 독노회에 의해 3개월 단기 선교사로 파송되었지만, 그는 동경 한인 유학생 교회의 기초를 견고하게 닦음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98) 이처럼 지식과 경험을 겸비한 유능한 사역자들이 단기간 일할 수 있는 선교 사역과 선교의 장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넷째, 재일 한국인 선교는 교회가 사회에서 억압받고 정당한 권익을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의 편에 서야 할 때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 교회는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social action)를 통해 망국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한인 유학생들뿐 아니라 한인 노동자들에게 소망을 심어 주었다.99) 특히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 독립 선언이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일제의 한국 전통과 얼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항거하여 한국어와 민족 정신을 보존하는 신앙 공동체로서 한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한 재일 한인교회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100)

B. 러시아 선교(1909-1930)
러시아 한인 동포(고려인)들은 1860년경부터 러시아 이주를 시작하여 구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기근과 일제를 피하여 고국을 떠난 자들로서 1910년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이후 그 수가 급증하여 1909년 당시 연해주에 약 20만 명의 한인 교포들이 집중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러시아 한인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 한 사람을 급히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09년 장로회 제3회 독노회는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 9명 중 한 명인 최관흘 목사를 매서인 한 사람과 함께 시베리아 동남쪽 항구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 러시아 한인 선교의 시작이다.101)
최관흘은 1909년 9월 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 입국한 후 11월 5일 연해주 지사에게 자신이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에 거주하면서 한국 국적의 장로교인 60명을 목양하는 한국의 장로교 목사임을 밝히며 이들을 중심으로 선교하겠다는 장로교회 설립 청원서를 제출한다.

나[최관흘]는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정교회 신자가 아닌 한국인을 상대로 장로교회를 조직하고, 한국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룩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장로교회를 조직하여 기독교인들이 일주일에 일요일과 수요일 두 번 한인촌의 한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102)

흥미로운 점은 최관흘이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 러시아 선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교회 교인을 장로교로 개종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서, 한국말로 진행될 한인 장로교 신자를 위한 집회와 예배를 위해 교회 설립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1909년 12월 23일 블라디보스톡 종교 감독국은 최관흘의 한인촌 예배 모임 허락(교회 설립) 요청을 거부하도록 요청하는 강한 어조의 공문을 연해주 지사에게 발송한다. 그 이유로 ① 최관흘이 블라디보스톡 한인 신자들만 섬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② 그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장로교 교리를 선전할 것이고, ③ 그들의 모임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한인]들과 정교회 교인[한인]들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03)
최관흘의 사전 약속에도 불구하고 종교 감독국은 한국 장로교의 선교 활동이 정교회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러시아 정교회 이외의 다른 기독교 종파가 정교회 영토 내에 들어와 전도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신교 전도자들을 허락하게 되면 자신들의 신조를 널리 전파하여 러시아를 혼란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 최관흘이 블라디보스톡은 물론이고 연해주에서도 장로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그를 본국(한국)으로 추방하라고까지 제안하고 있다.104) 그런데 이 청원서는 모스크바에도 보냈는데 1910년 2월 9일 최관흘은 모스크바 내무성으로부터 장로교회 조직과 예배를 조건적으로 허락한다는 회신을 받게 되고, 이후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105)
1910년 9월 18일 평북 선천에서 열린 제4회 독노회에 참석한 최관흘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톡), 슈청(빨찌산스크), 소왕령(우수리스크), 허바루께(하바롭스크), 합이빈(하얼빈) 등지의 한인 동포들 가운데 회개하고 예수의 복음을 믿는 형제가 많이 생겨났고,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보고했다.106) 이후의 선교 현황을 보면 최관흘이 1년 동안에 한인들이 거주하는 수백 킬로에 달하는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순회하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교세는 교인 648명, 수세자 39명, 학습 교인 68명이었다.107) 그리하여 1910년 제4회 독노회는 강도사 한병직을 조사(전도인)로 그리고 매서인 이재순을 블라디보스톡에 추가 파송하였다.108) 1911년 2년의 사역 결과는 교회 2개, 예배 처소 30개, 교인 764명, 헌금 902.29원(청국 포함)이었고, 동령교회와 소왕령교회는 독노회에 목회자를 보내 달라는 요청까지 했다.109)
또한 1910년경부터 만주·하얼빈에서 순회 전도하던 감리교 손정도 목사는 연해주로 이주한 감리교 신자들을 위해 일하면서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선교 활동은 더 활발해졌다.110) 그러나 1910년 10월부터 러시아 정교회뿐 아니라 러시아 지방·중앙 정부와 경찰에 의해 '개신교 이단'인 장로교를 전파하는 최관흘에게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다.111) 이런 핍박 상황 속에서 1911년 봄 최관흘은 독노회 전도국에 편지를 보내 선교비 부족과 전도문이 열리지 않아 선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임을 호소하면서, 블라디보스톡 지역을 감리교회에 넘겨 주자고 건의하게 된다. 그러나 1911년 9월 전도국은 이 제안을 부결시키고 최관흘에게 함경북도 성진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최관흘은 선교지 상황이 변했다며 철수하지 않고 그 곳에 머물렀다. 이후 전도국은 최관흘에 대한 '의심'과 '염려'로 인하여 캐나다 선교사 푸트(부두일, W. R. Foote), 미 북장로교 선교사 블레어(William Blair)와 양전백 목사 3인의 시찰 위원을 택하여 블라디보스톡 현지를 돌아보게 했다.112)
그 와중에 1911년 11월 17일 최관흘은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113) 1912년 9월 4일 제1회 장로교 총회 전도국 보고에 의하면 최관흘과 동역하던 매서인 이재순, 신윤협은 각각 블라디보스톡과 니꼴스크-우수리스크에서 전도 중에 핍박당하고 한 달간 투옥된 가운데 3번이나 이감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다가 1911년 12월 26일 추방 명령을 받았다.114) 결국 1912년 9월 총회 전도국은 최관흘 목사의 시무가 중단됨으로써 블라디보스톡 선교가 중지되었다고 선언한다.115) 시무 중단의 이유나 설명은 밝히지 않은 채, 그 선교 예산을 돌려서 제주에 2명의 전도인을 파송하는 데 사용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다가 1913년 9월 총회 보고서는 최관흘이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밝힌다.116) 아울러 같은 해에 총회가 산동 선교사 3인을 파송하기로 결의하자 전도국은 함경노회가 블라디보스톡 선교를 위해 쓰겠다고 헌의한 추수 감사절 헌금을 중국 선교에 전용하도록 했다.117)
1914년 9월 총회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간도 선교사 김영제(1910년 파송) 목사와 대영성서공회 총무 밀러(민휴, Hugh Miller)는 연해주 선교 상황을 시찰한 후, 블라디보스톡 지역 전도가 많은 방해를 받고 있고 최관흘 선교사가 딱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과 당시 그가 지내는 형편에 대해 보고했다. 흥미로운 점은 최관흘이 3년 후에는 '거류'를 자유로 할 것이니 총회에서 '소환'을 명하면 기쁘게 돌아오겠다고 한다는 것이다.118) 사실 이 시기는 최관흘이 정교회로 넘어간 후, 많은 도움을 받으며 교리 문답사로 활발하게 선교하여 한인들 가운데 많은 성과를 거두던 때였다.119)
그러나 1916년 9월 총회에서 최관흘은 함경노회에 의해 목사 면직을 당하고 만다. 이후 9년 동안 러시아 정교회 교리 문답사로 활동하던 최관흘은 1917년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1922년 9월 총회에서 함북노회에 의해 다시 복직이 허락되었다.120) 최관흘이 장로교 목사로 복직된 후 [한국 선교지](KMF)는 "한국 장로교회의 해외 선교 사업"이라는 글에서 그간 쟁점이 되었던 최관흘의 개종에 대해 그는 방해받지 않고 한인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정교회로 개종했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는 [최관흘의] 선교 사역 수행을 매우 어렵게 했는데 처음에는 한인들에 대한 모든 설교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최관흘은 러시아 정교회에 가입함으로써 한인 동포들을 위한 선교 사역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는 [정교회] 신부로 재안수를 받은 후 그렇게 했다.121)

1912년 9월 이후 한동안 중단되었던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그 곳 한인교회의 요청에 의해 1918년 장로교 총회는 김현찬 목사, 1922년 최흥종 목사를 파송함으로써 재개되었다. 이후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1922년 교회 32개, 총 교인 1,935명, 목사 5명, 장로 9명, 소학교 5개, 야학 35개의 교세로 성장하여 시베리아 노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탄압이 점차 심해지면서 선교 상황이 악화되어 1925년 장로교 총회는 시베리아 노회를 폐지했고 1929년 선교 보고를 마지막으로 20여 년의 블라디보스톡 장로교 선교는 끝나고 말았다.122)

러시아 선교의 의의
첫째, 러시아 연해주 선교는 고국을 떠나 방황하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한인 동포(디아스포라)를 위한 목회적 돌봄의 차원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해외 동포 선교는 한국 교회 해외 선교의 중요한 사역의 장이었다. 이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외국인을 위한 사역에 앞서 동족인 해외 이주 동포를 위한 선교를 먼저 추진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인 디아스포라 동포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초기 해외 한인 교회들은 오늘날 전세계 주요 도시마다 세워져 있는 한인교회의 묘판(苗板)이 되었고 "세계 선교를 위한 위대한 잠재력"으로 간주되고 있다.123)
둘째, 한국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와 새로운 선교 협력 혹은 에큐메니칼 연대적 관계를 맺은 후 선교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교단 차원에서 정교회와의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블라디보스톡 선교는 오늘날처럼 러시아 정교회와 정부의 방해와 핍박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러시아 선교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선교는 10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을 개종(proselytising) 대상으로 삼거나, 훔쳐 가는(sheep stealing)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교를 지양해야 한다. 러시아 정교회도 개신교를 자기 영역 내에 들어온 침입자로 간주하여 이단시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버리고 상호 협력하고 연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일치하기 어려운 교리적 영역은 놓아 두고, 협력 가능한 사역을 찾아서 에큐메니칼 차원의 공동의 증거를 지향해야 한다.
셋째,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에 관한 역사적 기록과 사료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준 실례이었다. 최관흘 선교사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지역에서 선교한 역사적 기록과 사료가 발굴되어 연해주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의 전통성과 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 10월 러시아 정부의 새 종교법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종교 단체는 재등록을 해야만 했는데 이 법은 개신교를 억제하고 정교회를 활성화하기 위한 속셈으로 공포되었다. 새 종교법은 1991년 블라디보스톡이 개방되고 6년째 되던 해에 공포되었기에, 개방 후에 입국한 한국 선교사들 모두가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124)
이러한 위기에 처한 한국 장로교 선교사(예장 통합·합동)들은 사료(史料) 보관소에서 고문서를 찾아 내고 모스크바 연방 정부 법무성과 기타 관계기관의 확인을 받아, 한국 장로교회가 1920년대까지 15년 이상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연해주 장로교단이 정식으로 법인 등록되었고, 러시아 정부가 개신교 탄압을 위해 만든 새 종교법으로 인해 도리어 한인 장로교회들이 법적인 보호를 받고 보다 안정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125)


IV. 한국 장로교회 선교 역사 반 세기의 교훈

1913년 산동 선교사 파송을 시작으로 복음을 받은 지 불과 30여 년 만에 피선교지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가 되고, 첫 선교사를 보낸 지 90여 년 만에 세계 2위의 선교사 파송국이 됨으로써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창조했다. 지나간 한국 장로교회 선교역사 반세기(1907-1956)의 유산을 회고하며 오늘 한국 교회에 주는 선교적 교훈을 검토하는 것으로 본 글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A. 선교적 교회
한국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선교적 교회로 출발하였다. 1907년 독노회 조직과 1913년 장로회 총회 조직과 함께 추진되었던 제주도와 중국 산동 선교는 한국 장로교회사와 선교 운동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시점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선교 형태는 먼저 동족을 돌아보는 한인 동포(디아스포라) 선교에서 시작하여 한인이 아닌 타문화권 선교로 확장되어 나갔다. 16세기 말 로마 가톨릭의 예수회 신학자요 논쟁가인 로베르트 벨라르민(Robert Bellarmine)은 진정한 교회의 표시 중 하나는 선교인데, 개신교회가 종교 개혁 이후 수십 년간 선교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회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고 힐난했다.126)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 교회로 참된 교회 되게 만든 표지(標識)는 바로 선교였다.

B.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
한국 교회는 선교를 교회의 본질적 사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산동 선교를 추진할 당시, 한국에도 복음을 전할 곳이 많은데 굳이 해외 선교를 해야 하느냐는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1917년 중국 산동으로 파송된 방효원 선교사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 발등에 불을 먼저 끌 것이요 언제 遠方을 생각하겠는가고 먼저는 우리부터라고 內地傳道만 치중하고 宣敎 같은 일에는 등한시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주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다 믿은 후에 外邦으로 간 것이 아니요, 바울 선교도 소아시아가 다 믿어서 구라파로 간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선교국들도 자기 선교국 사람이 다 믿어서 피선교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명인 소위이었으매 이 일을 진행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127)

또한 한국 교회는 몇 차례 선교비 조달의 위기를 겪었지만 결코 선교를 중단하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의 평양 신학교 교수이며 총회장을 역임한 남궁혁 목사는 경제 여건이 어렵다고 선교 사업을 축소하거나 중단해서는 안 되며, 일본과 만주 등지의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가 절박하다고 하여 산동 선교를 축소하거나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28)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회 재정이 어려울 때 맨 먼저 축소하거나 끊어 버리는 예산은 선교비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전통은 처음부터 그리고 어려울 때에도 선교하는 교회였다. 이러한 전통 때문이었는지, 한국 교회(1884년)는 인접 국가인 중국(1807년)이나 일본 교회(1859년)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기독교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선교사 파송을 시작했다.129)


C. 선교사 멤버 케어 시스템화
선교사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돌봄(care)이 있어야 한다.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적절한 사전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하고 선교지로 나갔다. 그리하여 초기 산동과 블라디보스톡 선교사들의 실패의 경험과 아픔은 총회 전도국(선교부)과 후배 선교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이들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이후 장로교 선교는 보다 개선된 선교 정책(안식년, 언어 훈련, MK 문제)과 안정적인 후원(사택과 선교 기지 구입, 자녀 교육비, 언어 교사와 사환 월급 보조)을 받으며 꾸준한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선교의 취약점은 선교사 파송에는 열심이지만, 파송 이후 적절한 관리와 돌봄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교사 개인뿐 아니라 교단 선교부조차도 훈련, 파송, 초기 정착, 안식년(본국 사역), 재교육, 영적 재충전, 건강 관리, 스트레스 관리,130) 갈등 해소, 은퇴 선교사 노후 대책, 그리고 선교사 자녀(MK) 교육 등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장 선교사, 본국의 후원 교회, 그리고 교단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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