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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의 기독론적 설교

김정우 교수(총신대 구약학)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말씀하시며, 구약성경과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해 주셨다. 예수께서 보실 때에, 시편은 분명히 그리스도이신 자신을 증거한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구약에서부터 증거하기 위해 많은 시편을 인용하셨다 (종합적인 목록은 본고의 맨 뒷 쪽에 있는 GNT 1993:887-8의 도표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이 해석학적 토대 위에서, 기독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애써왔다. 훌륭한 교부들(어거스틴, 카시오도루스)과 종교개혁자들(루터, 칼빈)과 설교자들(스펄전 등)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석가들은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이 사실이다.
사실 "구약에서 복음의 모든 진리를 찾아야 한다"(Farrar 1961:234)는 어거스틴의 금언(Finis legis est Christus; Hebgin & Corrigan 1960:12)과 "성경의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한다"(Farrar 1961:333)는 루터의 금언(Was Christum treibet)은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회의 영원한 임무요 또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인 이유는 구약의 계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비유를 가져 온다면, 스케치와 완성된 그림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우리가 완성의 관점에서 첫 스케치들을 돌아보는 것처럼, 완성된 신약 계시의 관점에서 시편의 스케치들을 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이유는 아직까지도 구약과 신약의 두 성경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는지 합의된 방법론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신구약을 잇기 위해 수많은 해석학적 방법론들을 만들어 왔다. 초대교회가 즐겨 사용한 “풍유적 해석”과 “예표적 해석”, 중세교회의 “사중적 의미”와 “충만한 뜻”(Sensus Plenior), 칼빈과 헹스텐베르그와 커크패트릭(Kirkpatrick)과 알렉산더(J. A. Alexander)가 제시한 “예언과 성취” 등의 방법론들은 구약의 의미와 신약의 의미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동안 시편과 신약의 관계를 가장 정밀하게 제시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델리취(Delitzsch 1973:64-71)는 시편과 신약을 잇기 위해 다섯 가지 형태의 예언을 시편에서 제시한다. (1) 예표적 시편은 시인의 경험이 그리스도에게 예표적으로 적용된 것이다 (34:20; 69:4, 9). (2) 예표적-예언적 시편은 시인의 현재 경험이 그리스도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된 시들이다(22편). (3) 간접적인 메시야적 시편들은 다윗과 그의 집이 더 큰 다윗의 아들에게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시들이다(2, 45, 72편). (4) 순전히 예언적인 시편은 그 내용이 오직 장차 오실 그리스도 만을 바라보는 시편이다 (110편). (5) 종말론적인 여호와 시편들은 주님과 그의 나라의 도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것들이다 (96-99편).
델리취의 방법론은 상당히 종합적으로 보이나, 전통적인 예표적 해석과 예언적 해석의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을 몇개의 제한된 본문에서만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델리취는 신약이 시편을 인용하는 방대한 구절들 중 오직 일부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두가지 극단은 피해야 할 것이다.
(1) 구약에는 기독론이 없다. 까젤은 “구약 성경에는 기독론이 없고,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는 기독론이 없었다”(1978:13)고 말한다. 이미 말시온은 초대교회 때부터 신구약 계시의 급진적인 단절을 주장하였고, 오늘날 종교사학파와 역사비평학의 문서설과 양식비평과 편집비평, 전승사 등의 방법론들은 구약을 신약의 빛 속에서 읽는 것을 정당한 방법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2) 신약의 기독론은 구약의 기독론이다. 많은 경건한 주석가들은 신약과 구약의 거리를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신약의 밝은 빛으로 구약의 모든 어두운 부분을 환하게 비추어 버리고, 구약과 신약의 의미를 동일하게 만들어 우리가 구약을 읽는지 신약을 읽는지 모르게 만들었다.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에 대한 우리의 출발점은 신약의 시편 인용이다. 우리는 신약의 시편 인용 속에 어떤 통일성 있는 해석의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 두 본문을 잇는 정당한 방법을 새롭게 찾아 보려고 한다. 그러나 신약이 기독론적으로 인용하는 시편들을 살펴보면, 두가지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1)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편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된다.
(2) 아주 중요한 기독론적 시편으로 기대한 시편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런 난제(the Gordian gnot)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정경적 해석법(the canonical criticism)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 방법론은 1970년대 차일즈가 기초를 세우고(Childs 1970, 1979), 80년대 왈키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전개하였다 (Waltke 1981). 왈키는 정경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1)원래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는 원저자의 의미, (2) 정경이 초기에 수집된 때의 의미, (3) 정경이 완성된 후의 의미, 그리고 (4) 신약 성경에 첨가된 완성된 최종적 의미 사이에 유기적 통일성이 있으며, 한 본문의 의도는 정경의 범위가 확장되어 가면서 더욱 명료해 졌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차일즈와 왈키의 토대 위에 보다 완성된 형태의 정경적 해석법을 시편을 중심으로 세워 보고자 한다. 우리의 정경적 방법은 아래의 세가지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1) 구약과 신약 본문의 고유한 의미는 훼손되어서는 안된다. 각 성경은 각자의 독자적인 의미의 세계를 가진다. 이 의미는 본문의 형식과 구조와 배경과 주석과 신학으로 결정된다.
(2) 구약의 의미는 성경 계시가 발전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넓어져 신약으로 완성되며, 두 성경의 의미는 서로 유기적 조화와 통일성을 이룬다.
(3)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서로 다른 독자적 의미를 계시의 유기적 조화와 통일성 속에서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구약의 발판을 딛고 신약으로 넘어가도록 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두 성경의 증거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동안 기독교회는 주로 신약이 시편을 인용하는 범위 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여 왔다. 정경적 해석은 신약이 시편을 인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구약 의미와 신약 의미 사이에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을 것이다. 논문의 제한상, 우리는 저주시와 애가시와 제왕시 중 몇 편을 선택하여, 기독론적 해석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형성해 보고자 한다.

1. 저주 시편에서 본 기독론적 설교의 조망 (시편 69; 109편)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의 신비를(!) 벗기는 출발점으로 69편을 살펴보자. 이 시편은 소위 구약에서도 가장 난해하며 악명 높은(?) “저주시”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던져져 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며 큰 물이 내게 넘친다”고 말한다(2절). 좀더 구체적으로 그는 “취하지도 않은 것을 물어 주어야 하며”(4절), 또한 감옥에 갖혀 있는 것 같다(33절; 107:10이하). 나아가 그는 심하게 앓고 있는 것 같으며(26절), 이 와중에 원수의 공격도 심하다 (19-21절). 이런 배경 속에서 시인은 자신의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를 드린다.

22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24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26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시편 69편과 유사한 저주의 기도는 109:5-15에서도 발견된다.

5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7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9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 고리대금하는 자로 저의 소유를 다 취하게 하시며
저의 수고한 것을 외인이 탈취하게 하시며
12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13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14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
이 두 시인의 저주 청원은 너무나 혹독하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오는 불길과 같다. 오늘날 시편 학자들은 이런 저주 시편에 대해 높은 영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주 소원을 시인의 인성의 표현으로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배제한다. 루돌프 키텔에 따르면, 이 시인들은 “정복과 보복 만을 생각하는 저열한 인간들”이다. 존 브라잇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했으나,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모습”으로 본다. 비어즈리는 시인들이 “영적으로 여명의 시간에 있었다”고 여기며, 반즈는 “부분적으로 성화되었다”고 생각한다. C. S. 루이스는 여기의 기도들이 “자기 연민에 가득찬 야만인의 혹독한 말”이라고 한다.
시편 137:8-9,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는 말씀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시편에 대해, 궁켈은 “미워하고 보복할 줄 아는 고대 유대인의 표현”으로 본다. 문희석은 “원수에 대한 증오가 잔인하고, 극치이다”라고 말한다 (<오늘의 시편연구>). 김정준은, “강한 민족주의의 표현이다. 철저한 복수심의 발로이다. 비복음적이다. 이런 저주를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약점과 감정적인 것이 이 시인의 인간성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장차 나타날 ‘복음’은 이 인간성을 승화시키는 성령의 역사일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예수는 자기를 못박는 자를 위해 기도하셨다” (<시편명상> 433). 존 브라잇은 시인이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경건하여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사람의 전형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그는 신학적으로 예수께서 오시기 전의 시대(B.C.)에 사는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레기온, 즉 ‘군대’이다”라고 말한다(<구약의 권위> 1967).
문제는 위의 두 시편(69편; 109편)이 신약에서 상당히 자주 인용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용되었다는 데 있다. 신약이 이 시편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1)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 보다 많고”(4절상)에서 “무고히”는 거짓말을 꾸며 내었다는 뜻이다. 시인의 원수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시35:19; 38:19). 여기의 “거짓말”은 거짓 고소를 뜻하는 듯 하다. “나를 미워다”(sana')는 극심한 증오심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이 절을 자신과 자신의 원수들의 관계에 적용하신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25). 예수는 무고히 고발을 당하며, 정당한 이유 없이 미움을 받고 배척된다.
(2)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9절)에서 우리는 시인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전에 대한 열심이 특별하다. 여기에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제시되지 않는다. 아마 시인은 성전을 개혁하고 싶었을 수 있으며, 혹은 성전예배의 참된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을 수 있다. 이 열정이 자신을 “삼킨다” 즉, 그는 지킬 줄 모르는 헌신을 드리며, 자신을 파멸시키는 데까지 간다.
그러나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고 말한다. 아마 그 자신이 훼방을 받든지, 혹은 원수들이 주님에 대해 신성모독적 행동이나 발언을 하였을 것이다. 7절에서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다”고 말하며, 여기에서는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주님 대신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 그는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4절), 주님에 대한 열정적 헌신 때문에 시련을 당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때 인용된다(요 2:13-22). 이 때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7).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청결 사건은 바로 그의 죽음을 초래하였으며, 그는 “성전을 허무는 자”라는 죄명으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나아가 바울도 이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3).
(3)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21절)에서 “쓸개로 나의 식물을 주었다”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독 있는 음식을 주는 것 같다. “쓸개”는 너무나 쓴 음식이다. 옛날에는 마음이 상하거나 초상을 당한 사람에게 쓴 음식을 주어 먹게 하였다(삼하 3:35). 그러나 “쓸개를 주는 것”은 기진 맥진한 사람에게 삼킬 수도 없는 음식을 주는 것과 같다. 또한 시인의 원수들은 목마른 사람에게 “초”를 주는 것 같이 시인을 괴롭힌다. 여기의 “초”는 조청처럼 달콤한 것이나 레몬 주스처럼 상큼한 것이 아니다 (민 6:3; 룻 2:14). 이것은 너무나 시어서 구역질이 나게 하는 마실 수 없는 포도주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나타난다. 요한은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요 19:28). 이 때 군병들은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 27:34, 48절 참조). 이리하여 시인이 당하는 신체적인 고난(21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그림자가 된다(요 19:28이하).
(4)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22-23절)는 로마서 11:9-10에 인용된다.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바울은 시편 말씀을 목이 곧은 유대인들에게 적용한다. 로마서의 본문은 아마 70인역으로부터 자유롭게 가져온 것 같다(시 35:8과 유사하다).
(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25절)는 사도행전 1:20에서 인용되며, 가롯 유다에게 적용된다,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6) 사도행전 1:20절의 하반절 말씀,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는 시편 109:8에서 인용된 것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이런 저주시에서 기독론적인 설교를 하였을까? 이런 시편과 이 시편의 구절들은 예수께서 끄집어 내어 부각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의 시선을 끌지 못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주석가들의 상상을 넘어, 이런 저주시에서 조차 자기 사역의 본질을 생각하시고, 또한 사역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이 인용한 시편 69편과 109편의 몇 절 뿐 아니라, 인용하지 않은 절들에서도 기독론적 조망을 찾을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저주시들이 기독론적 차원을 가진다면, 다른 모든 시편도 기독론적 차원을 가진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만약 신약의 시편 사용이 우리의 기독론적 설교의 바탕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주시의 성격에 있다. 예수께서는 저주시와 깊은 거리감을 두고 본문을 인용하는 것 같지 않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위에 열거된 여러 학자들처럼 저주 시편을 영적으로 저급한 시들로 여기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저주시"들도 높은 구약적 영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기신다.
왜냐하면, 저주시에서 시인들은 개인적인 보복심(revenge)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하려는 정신(avenge)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다윗이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원수 갚은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개인적으로 복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의 원수였던 시므이에게도 같은 태도를 보여준 것과 같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의 종이다(시 69:17절상). 그는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열정을 갖고 있다. 그는 무흠하나 고난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그는 심각한 대립을 경험한다.
시인은 궁극적으로 악인과 악을 제하고, 의인을 일으키길 구한다. 따라서 이 기도는 윤리적이다. 그는 레닌처럼 어떤 사회적 계층을, 히틀러처럼 어떤 인종을 제거해 주길 구하지 않는다. 그는 진리가 거짓을, 의가 불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저주 시편을 하나님의 성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기도로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저주시 속에 기독론적 해석의 발판이 있다고 본다.
물론 우리는 시편 69편과 109편이 신약과 불연속성을 이루고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시인의 죄고백 (5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도록 가르치셨다 (마5:39-42). 이 점에 있어서 저주시의 "저주"는 더 이상 한 개인에게 적용되지 않으며, 악의 더 깊은 실체인 사단과 영적인 세력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주님은 그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 23:34; 행 7:59-60참조).

2. 애가의 관점에서 본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의 조망
우리는 저주시에서 다른 애가로 옮겨가 보자. 여기에서도 일차적으로 신약이 시편을 인용하는 관점을 따라 가보며, 궁극적으로 신약의 인용을 넘어 정경적 관점에서 살펴 보자. 위의 두 시편도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관되어 나타났다. 수난설화에는 많은 애가들이 인용된다.

1) 친구에게 배신 당한 자의 애통 (시편 41:9)

9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 시편에서 시인은 원수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옛 친구들 때문에 애통한다. 그의 원수들은 자기 친구들까지 훔쳐가고, 그들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리하여 시인은 가장 친한 친구들의 공격 때문에, 서글퍼하며 깊은 실망감을 드러낸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신공격을 받는다. 우리 주님도 가장 가장 친밀한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했다. 비방을 받거나 배반을 당해도 너무 큰 슬픔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이 무서운 악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다. 인내로 참아라”(스펄전).
“나의 가까운 친구”는 직역하자면 “내 평화의 사람”(렘20:10; 38:22)으로서, 현대어 번역에서 “흉허물 없는 친구”(표준역), “내 가장 좋은 친구”(TEV), “내 소꼽친구”로 번역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평화”(샬롬)는 언약 관계를 뜻하는 것 같다. 우정은 평화의 언약을 동반한다(삼상18:3). 시인의 친구는 “평화 언약의 친구”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한 상에서 “내 떡을 먹던 친구들”이었다. 이 구절은 손님으로서의 특권과 의무를 암시해 준다(요13:18참조). 언약 체결은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으로 인쳐진다(창26:29-30; 31:53-54).
시인의 친구들은 그에게 “그 발꿈치를 들었다.” 이 표현은 구약에서 오직 여기에 단 한번 나타나므로 정확한 뜻을 알기 힘들다(1QH v:23-24 참조). 우리말 현대어 번역에서는 “발길질을 하려고 뒤꿈치를 들었다”(표준역), “저를 거슬러 발꿈치를 들어 올린다”(임승필)로 제시된다.
이 표현은 “폭력”을 내포하며, 모욕과 배반을 담고 있다. 따라서 어떤 번역에서는 “나를 배반하였다”(SPCL), 혹은 “나에게 철저하게 거짓되었다”(NJV), “남을 넘어지게 한다” (코헨). “세차게 찬다” (델리취), “짓밟다” 혹은 “폭력을 행하다”(창3:15) 등으로 제시된다. 크레이기는 “발꿈치”를 “적의에 찬 비유”로 본다 (렘9:3참조). “어떤 사람에게 발꿈치를 들다”는 적대감에 대한 표현이 된다. 앞으로 차든지, 되차든지 간에 이 영상은 아주 생생한 그림 같다.
이 시편 구절은 요한복음 13:18에서 인용된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한은 시편 41:9과 55:13-15에 있는 친한 친구가 시인의 원수가 되는 것을 통해, 다윗의 신임을 받는 자가 그에게 등을 돌린 것과 예수께서 가롯 유다에게 배반 당하신 것을 연결한다. 주후 1세기의 유대인들은 이 두 본문을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한 것으로 해석하였다(b. Sanhedrin 106b [랍비 요하난], 시편 탈굼 55, Num R. 18:17등). 초대교회 역시 이 두 시편을 다윗의 전기로 여겼기 때문에, 배신한 친구를 아히도벨로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따라서 마치 다윗이 아히도벨을 피해 도망칠 때, 기드론 계곡을 통과한 것처럼(삼하 15:23), 예수께서 기드론을 건너신다(요 18:1). 마치 감람산에서 다윗이 아히도벨의 모략이 어리석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처럼(삼하 15:30-31), 주님께서도 감람산에서 고난의 잔이 지나가도록 기도하신다(막 14:32-42). 마치 아히도벨이 밤에 습격하여 다윗 왕을 죽이자고 한 것처럼(삼하 17:1-2), 가롯 유다도 밤에 예수를 찾아 온다. 아히도벨이 다윗에 대해 압살롬에게 한 말(삼하 17:3)은 가야바가 산헤드린에서 한 말과 같으며(요 11:50), 유다도 후회하며 그렇게 말한다(마 27:5). 아히도벨은 구약에서 전쟁의 배경 없이 자살한 단 한사람이다. 유다는 신약에서 그러하다. 유다와 아히도벨 사이에는 유사성이 너무 많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자신의 배신을 말씀하시면서, 본 시편을 인용한 것을 담고 있다(요 13:18). 이리하여 원래 죽음에 직면한 병자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자신의 배신을 예고한 예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주님은 자신의 제자에게 배신 당하는 것을 생각하시며, 시편 41:9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만약 시편 41:9의 이 한절이 기독론적 의의를 지닌다면, 41편 전체를 기독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며(1절),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사 살게 하실 것이다”(2절).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쇠약한 병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여 죽음에 승리하시고(3절), “영영히 주의 앞에 세움받으신다”(12절).

2)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수난의 종 (시편 22편)

(1) 하나님에게 버림받음 (시 22:1; 마27:46; 막15:34)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편을 열어주는 첫 절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어둡게 그려준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하나님의 유기를 항의하고, 유기의 고통을 호소하는 부르짖음이다(10:1 참조). 바로의 딸은 자신의 시종들이 유아 모세를 나일 강에 “버려두고” 온 것을 같은 형식으로 꾸짖는다(출 2:20). 예레미야는 “왜 주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며, 영원히 버리시는지”(애 5:20)라며 애통한다. 이 형식은 단지, “청중과 독자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목적으로 던진 질문”(THBP, 213)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기에 대한 항의와 자신의 외로움과 절망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흥미롭게도 신명기 28:20에서는 동일한 표현(“나를 버리다”)이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된다.
시인은 “신음 소리”(dibrey sha'agati)를 내고 있다. “신음”(she'aga)은 주로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욥 4:10; 사 5:29; 겔 19:7; 슥 11:3). 시인의 고통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그는 “끙끙 앓는” 정도의 신음으로 그치지 않고, 사자처럼 부르짖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이 단어는 깊은 질병과 시련의 고통 가운데서, “한숨”('anacha)과 평행을 이루며 나타난다(욥 3:24).
이 극심한 고통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이 고백은 복음서에서 두번 인용된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 27:46).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 15:34). 이리하여 원래 시인이 자신의 시련 가운데 하나님의 유기에 대해 애통한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유기를 경험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므로, 오직 그만이 이 애통을 할 수 있었다.

(2) 원수들의 조롱과 "머리를 흔듬" (시편 22:7; 막 15:29)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이 절에는 원수들의 비웃음이 나타난다. 그들은 시인을 조롱하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든다.” 이 모습 속에 빈정댐이 가득차 있다(욥 16:10; 시 35:21). 이것은 명백하게 조롱하는 모습이다. 원수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시인을 멸시하고 가증스럽게 여긴다(시 44:14; 64:8; 109:25; 애 2:15; 욥 16:4).
시편 22편의 시인과 같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그를 못박던 관원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고 빈정댄다(눅 23:35). 또한 군병들도 신포도주를 주며 희롱하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한다(36-37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그를 모욕한다(마 27:39; 막 15:29). 이리하여 시인의 경험이 예수의 경험이 된다.

(3)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 22:18;요 19:24)

이제 원수들은 죽어가는 자의 옷을 벗긴 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던진다. 이 절은 시인의 “겉옷”은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 뽑아 간다는 뜻은 아니다. “겉옷”과 “속옷”은 함께 평행으로 나타나며(시 102:26; 사63:3), 이 둘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소유물”(Kraus 시편: I:298)이다. 원수들은 이것들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 제비 뽑는다는 뜻이다. 우리 말에 “옷을 벗기다”는 그 사람의 직업과 신분을 빼앗으며, 사회적인 모든 권한을 박탈하는 것과 연관된다. “겉옷”을 빼앗기는 것도 억울한 일인데(욥 24:7-10; 미 2:8), “속옷”까지 벗기우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인 수치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겉옷”과 “속옷”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냥 “옷”으로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입고 있는 마지막 소유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 앞에 발가벗기는 수욕과 치욕을 당한다. 그의 고난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9:24).
시편 22편에 나타난 시인의 경험은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Reumann 1974: 40를 보라). 예수의 수난설화에서 초대교회는 시편 22편을 “메시야 예언시”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시인의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이 된다. 시인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조롱받고, 원수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사망의 진토까지 내려갔다. 여기의 시인이 받는 고통과 구원, 애가와 찬양은 전형적인 성도의 고난이 되며, 시인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밀접한 관련성을 맺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님만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고 완전하게 버림받은 자가 없다. 구약이 묘사하는 고난의 원형이 그에게 있다. 달리 말하자면, 시인의 경험은 은유적이고 간접적이지만, 주님은 실제적인 경험을 하셨다. 시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느낌만 받았지만, 우리 주님은 정말 버림을 받았다. 주님은 버림받을 이유가 없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계속 시편 22편을 묵상하시고, 이 시편을 따라 기도하셨다. 그는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면서 이 시편의 첫 말씀을 읊조렸다. 그는 이 시편의 기도를 따라,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수난을 통과하였다.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 때문에 애통하였고, 친구들의 조롱 때문에 괴로워했으며, 악한 원수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와 믿음으로 고난을 잘 받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새 생명을 얻었고,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신다. 따라서 시편 22편은 신약에서 인용된 몇 구절 만 기독론적 차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가 기독론적 의의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3)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함 (시편 31:5; 눅 23:46)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시편 31:5).

시인은 첫 기도를 마무리 하면서, 주님에 대한 확신을 천명하며 주님 손에 자신을 맡긴다. 그의 목숨은 원수의 손에 던져졌다. 원수의 손이 그를 사로잡고, “너의 목숨은 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원수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맡긴다. 주께서 그를 건지실 것을 확신한다.
예수께서 상반절 말씀을 십자가에서 이 절 일부를 인용하셨다. 임종의 순간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셨다”(눅 23:46).
히브리어로 “부탁하다”는 “맡긴다”는 뜻이다. 이 시편에서 이 기도는 임박한 죽음에서 벗어나길 구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보전해 주시길 구하는 것으로서 믿음과 신뢰를 천명해 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실제적으로 운명하시면서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기신다. 주님의 제자들도 유사한 상황에서 이 말씀을 읊조렸다. 폴리갑도 루터도 임종의 순간에 이 기도를 드린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강한 기도이다. 하나님의 성실성이 그들을 굳게 붙들 것을 확신한다.

4)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시편 34:20; 요 19:36)

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시인은 어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불길을 태우고 있다”(Daglish 27).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함을 고백하며, 구체적으로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신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건강을 보호하신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뼈를 보호하신다”는 주님의 보호가 특별하다는 것을 뜻한다. 히브리 사고에서 뼈는 건강의 척도이며 인격의 동의어이다 (시 35:10; 6:3). 구약에서 의인은 뼈가 뿌러지는 경험을 하며(미 3:2-3), 때로는 죽임도 당한다. 다글리쉬에 따르면, 시편 34편의 지혜자는 “의인의 뼈가 아무리 많이 깨어져도, 그의 성품을 빼앗을 수 없고, 그의 온전성을 깰 수 없다”고 말한다 (Daglish 27).
이 시는 먼저 다윗의 인생에서 적용되었으며, 신약시대에는 메시야의 고난에 적용된다. 사도 요한은 이 시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용한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요 19:36). 요한은 예수의 시체부검에서 “뼈가 하나도 상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 인용은 유월절에 대한 의식적인 성격을 깔고 있다. 유월절에는 어린 양의 뼈를 부수는 의식이 있었다 (출 12:46). 이런 배경 속에서 시편 34편의 지혜자는 이 규례를 따라 금언을 만든다. 즉,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과 동일시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했으나,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 즉, 죽임을 당하셨으나, 자신의 존엄성과 온전성을 빼앗기지는 않으셨다. 이리하여 시편 34편의 궁극적인 뜻은 예수의 죽음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원래 감사와 지혜가 하나로 어우러진 이 시편은 먼저 다윗의 인생에서 적용되었으며(시편 34편의 표제), 신약시대에는 이 시가 메시야의 고난에 적용된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이 시를 성만찬에서 사용하였다. 특히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9절)는 성만찬 식사에 아주 적절한 초대로 여겨졌다. 여기에서 “맛보다”는 동사는 원래 만나를 먹는 것과 연관되었으며 (출16:31; 민11:8), 메시야의 잔치와도 이어진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죽음과 메시야 잔치가 시편 34편에서 읽혀지게 되었다.

5)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편 16:10-11; 행 2:25-28).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며
거룩한 자로 썩지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편:10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해석이 다양하다. 대부분 주석가들은 시인이 급사하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바이져는 시인이 아주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고 있으며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시인은 마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정복하려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상반절에 있는 “나를 음부에 버리지 않는다”는 표현은 구약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자기 종이 때가 되기 전에 죽게 하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살아 있는 동안 그가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가 끝나버리지 않을 것이다. “음부”는 죽은 자가 가는 곳이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쉽게 음부에 보내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의 중심 관심은 갑작스럽고, 불운한 죽음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건짐 받을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한평생 살아왔다. 이 사실에서 그는 희망을 찾는다.
하반절에 있는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lo' …… lir'ot shachat)에서 “썩다”(shahat)는 “구덩이”(ditch) 혹은 “무덤”을 뜻하기도 하며 (30:9; 49:9; 103:4), 혹은 “부패함, 파멸”을 뜻할 수도 있다. 표준역(“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과 임승필(“구렁을 보게 내버리지 않으시니”)은 전자를, 개역(“썩지 않게 하실 것”)과 공동역(“어찌 썩게 버려두리이까”)은 후자를 따른다. “구덩이에 두다”는 결국 “썩다”는 뜻이 된다. 어쨌던 시인은 자신이 “주님의 거룩한 자”로서 쉽게 무덤에 던져지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이 소절에 대해 다후드는 시인이 에녹과 엘리야처럼, 죽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직접 나아갈 것을 바라보았다고 해석한다. 하반절이 상반절과 똑 같은 뜻이라면, 시인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으로 바로 올라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창5:24; 왕하2:1이하). 그러나 로울리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신앙 보다는…… 희미한 믿음”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은 자신이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협에서도 건지실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편은 원래 메시야 시도 아니며,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도 않지만,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관하여 본문을 해석하였다. 베드로는 오순절에서 이 본문을 예수에게 적용하여 그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용한다 (행 2:25-28).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바울도 안디옥의 회당에서 이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인용한다.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행 13:35). 두 사도의 기독론적인 시편 해석의 근거는 무엇인가? 물론 성경은 이중적 의미와 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발판을 제대로 찾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의 해석을 살펴보면, 그들은 시 16:10을 “다윗의 몸을 기적적으로 보전할 것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한다”(Juel 1981:45). “이 구절은 다윗의 육신이 썩지도 않고, 벌레가 권세도 없음을 말한다”(Braude, Midrash, 1:201). 그러나 어떤 기독교 주석가도 이렇게 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시편 말씀을 다윗에게 주어진 메시야적 약속으로 보았다(시132:11; 대하 6:9-10 [LXX]). 즉, 시편 16편은 오실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먼저 두 사도는 다윗을 시편의 저자로 여겨, “내 영혼”을 이 약속의 주체인 다윗 자신과 동일시 한다. 그렇지만, 다윗은 이미 죽었고, 장사되었으며, 그의 육체는 “부패함을 보았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윗을 가리키는 것일 수 없다. 오히려, 다윗은 예언적 환상 중에, 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부활하고, 부패함을 보지 않았으므로, 다윗이 바라본 그리스도는 예수가 된다. 오직 그만이, 그의 부활을 통해, 시편에 제시된 기준에 일치하였다. 또한 부활 때에 예수는 왕으로 등극하며 (행 2:34-36),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행 13:33). 이리하여 시편 16편이 그리스도에게 이루어진다고 두 사도는 보았다(Bassler 1986:64를 보라).
사도행전 2:24은 신약교회가 시편 16:8-11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죽음에 적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이 시편이 제시하는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함으로써 부활 신앙에 대한 구약적 근거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하나님이 그(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행 2:24, 32; 3:15; 5:30; 10:40; 13:30, 34)는 신약 교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 고백이다. 이리하여 시편 16편의 시인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죽음의 위협에 처하였을 뿐 아니라, 사실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그에겐 죽음이 끝이 아니었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시인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새 생명을 얻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하나님께서 시인을 스올에 던지지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던지셨고, 또한 그곳에서 구원하셨다. 베드로와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서 온 인류를 향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시편 16편은 예수의 제자들이 메시야 소망을 새롭게 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예수는 하늘에 살아 계시며, 부활의 현현을 그들이 경험함으로써 마음 속에 이런 신앙이 생겼다. 예수는 시편에 예언된 대로 죽음에서 부활하였다. 그는 메시야이다” (Boers 1969: 107).
우리는 위에서 신약이 인용하는 몇몇 애가시들을 기독론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시인의 고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았으며, 신약이 이 시들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들을 찾아 보았다. 위의 연구를 통해 볼 때, 신약에서 인용된 몇몇 애가의 구절들만 기독론적 차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시편 전체를 기독론적 조망 속에서 볼 수 있음을 알았다. 만약 위에 인용된 시편들의 몇 구절들이 기독론적 해석의 파라다임이 될 수 있다면, 다른 애가시들도 기독론적으로 해석해 갈 수 있을 것이다.

3. 제왕시에서 본 기독론적 설교의 조망

우리는 위에서 아주 어려운 시편들을 중심으로 기독론적 해석을 위한 파라다임을 발견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좀더 친숙한 소위 메시야 시편들을 중심으로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해 보자.
제왕시의 기독론적 해석은 일견해 볼 때 대단히 쉽다.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인용하는 많은 시편들이 제왕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편의 제왕시를 중심으로 정경적 관점에서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해 보자.

1) 시편 2편: 시온산에 등극한 하나님의 아들과 그의 우주적 통치

시편 2편은 다윗 언약 (삼하 7)의 핵을 담고 있다. 이 시편에는 다윗도 언약도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다윗 언약의 진수를 드러내고 있다. 시편 2편은 다윗 언약을 새 왕의 등극 의식 배경 속에서 제시한다. 다윗의 후손은 “기름 받은 자”가 되며, 주님께서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운 자”가 된다. 그는 주님의 “칙령”을 받은 자로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는 언약 관계 속에 들어가며, “열방을 유업으로 얻는” 약속을 받는다. 그의 통치는 땅 끝까지 미칠 것이다. 이리하여 시편 2편은 후대 성경신학에서 중요한 교차로를 이룬다. 이 시편은 구약신학에 있어서 다윗 언약에 대해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제왕적 관점”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신약신학에서 볼 때 후대 종말론적인 메시야 사상의 모판이 된다.
신약에서는 시편 2편을 명백하게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행 4:25-26; 13:33; 히 1:5; 5:4; 계 2:26-27; 19:15; 마 3:17과 병행구절[막 1:11; 눅 3:22] 등). 그렇지만, 시편 2편에 대한 기독론적 해석은 대부분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에 매여 있다. 불트만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어서 이 칭호의 불연속성에 대해 강조한다. “유대교와 기독교회에 있어서, 이 칭호는 후대 헬라 기독교에서처럼, 신화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즉,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초자연적인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의 칭호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 칭호를 “신화적 의미”로 이해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예표적인 관계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정경적인 해석은 단지 시편 2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해석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시편 2편 전체를 신약성경의 빛 속에서 읽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뭇나라들과 민족들이 메시야를 대적하는 것과 주님의 비웃음과 새 왕의 임직식과 “땅끝까지 이르는 소유”와 철장으로 깨뜨릴 수 있는 권세와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권면까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구원 사건의 빛 속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 2편의 높은 이상은 결국 다윗의 육신적 후손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편 속에 담긴 메시야 왕의 우주적인 통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다.

2) 시편 45편: 아름다운 왕의 결혼 의식

시편 45편이 전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모티프가 너무나 독특하다. 먼저 왕은 너무나 아름다운 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입술에는 은혜가 있다. 그는 칼을 허리에 차고 영화와 위엄을 입고 있다. 그의 화살은 날카롭다. 만민이 그 앞에서 엎드러진다. 그는 위대한 용사이다. 그는 진리, 온유, 의를 위해 싸운다. 그는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한다.
또한 시편 45편의 왕은 새 신랑으로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으며, 향기로 가득찬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상아 궁에서는 현악이 들려온다. 이렇게 완전한 왕이 있을 수 있을까? 그의 모습은 현상적인 지상의 왕에 근거하고 있지만, 지상의 왕을 넘어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겐 하나님의 영광이 감추어져 있다. 곧 그 영광이 그의 인격과 삶 속에 완전히 나타날 것이다. 이 시편 속에는 빛나는 영광, 향기가 가득찬 아름다움, 기쁨으로 가득찬 현악, 용맹이 넘치는 용사, 정의와 온유와진리를 추구하는 왕, 은혜를 머금은 입은 왕중의 왕, 아름답고 영화로운 신부와 새 가정, 새 나라를 이루는 왕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까?
히브리서 기자는 1:8-9에서 시편 45:7-8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바로 시편 45편의 말씀이 "아들에 관한" 말씀이라고 한다. 예수 안에서, 마지막 날에 나타날 아버지의 영광과 형상이 반영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지 시편 45편에서 인용된 두 구절만 아니라, 이 시편에 묘사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왕의 모습 전체가 두번째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메시야의 입술은 은혜를 머금고 있다. 그는 복음의 말씀을 전한다(눅 4:22). 그는 무능한 자가 아니고 불의를 대적하며 승리하는 용사이다. 그는 진리, 온유, 공의를 세우신다. 그 자신이 진리이시다. 그는 온유한 분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 그의 왕권은 영원하다. 이 나라에 평화와 희락이 있다. 그가 입은 옷은 몰약, 침향, 육계의 향기로 가득찼다. 그의 인격은 너무나 아름답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보좌에 앉으시고(시 45:6), 의로 다스리신다. 교회는 신부로서 자기 집을 떠나 왕을 경배한다(45:11).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를 따라야 한다. 그를 경배해야 한다. 그에게 완전한 복종을 드려야한다. 신부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수놓은 옷을 입고 왕께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실일 것이다. 왕과 신부의 아름다운 사랑과 연합이 있다. 기쁨과 축하, 현악, 완전한 행복이 이 왕으로부터 온다. 결혼의 궁극적인 축복은 아이들(45:16)에 있다. 미래의 세대를 통해 왕국이 번성한다. 교회는 더욱 많은 영적인 아들을 낳고 길러야 하는 사명이 있다.

3) 시편 72편: 메시야 왕의 이상적인 통치 이념

원래 시편 72편은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왕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다. 이 시는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잘 그려주고 있다. 백성들은 왕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이상적인 통치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왕이 공의를 추구하고 생명을 보전하며 힘있게 왕권을 행사하도록 구한다. 왕은 사회적 공의를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한다(사 1:12-17; 암 5:14-15, 24). 왕은 장수해야 하며, 또한 땅에 풍요를 가져오는 통치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와 경제의 지도자들이 가난한 자, 궁핍한 자, 압박당하는 자를 구하고 이 사회에 참된 평강이 임할 수 있도록 올바른 판단력과 의를 갖출 수 있도록 기도한다.
시편 72편은 신약에 인용되지 않지만, 시편에 담긴 이상적인 왕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1)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4, 12-15절)는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성취된다. (2) 솔로몬의 범세계적인 통치의 꿈(8-1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에서 성취된다. (3) 솔로몬의 평화로운 통치에 대한 이상 (16-17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평화로운 통치로 성취된다.

4) 시편 110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왕
시편 110편은 신약성경에서는 가장 많이 인용한 시이다. 마태복음 22장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어려운 질문을 여러개 던지는 것이 나타난다. 이들과의 논쟁을 생각해 볼때 예수께서는 시편 110편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편 110편 속에서 자신의 신분을 이해하였다. 바리새인들도 이 시편이 메시야 시편임을 인정하였다. 예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시편의 왕이 자신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시편 110편이 다윗 왕들에게 역사적으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사실 이 시편에 있는 말씀들이 역사적인 왕들에게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크다. 시편 110편의 옷은 너무나 장엄하여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바로 시편 110편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지만 친히 말하여 가로되” 라고 말하며 시편 110:1을 인용한다(행 3:34-35). 그의 결론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시편 110편은 오순절 설교의 절정으로 나타난다. 초대교회는 이 시편 속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권능의 보좌 우편에서 자신의 왕권을 행사하신다. 그는 죽음과 죄와 사탄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는 영광스러운 왕이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둔다"는 표현은 바울서신의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25이하는 바로 이점을 다루며 만유의 주로서 그리스도를 전한다(엡 1:20; 골 3:1; 벧전 3:22).
특히 히브리서 기자는 여러 곳에서 시편 110편을 인용하고 있다. 무엇 보다 5:6에서는 아론 보다 나은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네가 영원히 멜리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는 시편 110:4을 인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을 부각시킨다(8-10절). 즉,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요 영원한 왕이시다. 그는 아론 보다 나은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세습으로 제사장직을 얻지 않았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아론도 아브라함의 허리 아래에서 멜기세덱에게 경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제사제도를 시작하셨다. 그것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가능해졌다. 이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5) 시편 18편: 완전한 왕의 고난과 승리

그러나 제왕시에는 “영광스러운 왕”의 모습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수난당하는 왕의 모습도 이외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편 18편의 주인공은 기름부음 받은 왕이었다. 그는 깊은 물에 빠지고, 음부에까지 내려갔다. 사망의 줄과 음부의 물이 그를 덮고 있다. 그는 강한 원수와 자기를 미워하는 대적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아무도 그를 구원할 수 없는 정황에 던져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하늘에서 내려 오신다. 기름부음 받은 왕인 그는 고난받는 종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완전했다. 그는 의로운 자이지만 고난을 받는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이 그에게 임했고 그는 승리하였다. 시편 18편의 시인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다. 고난 후에 영광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편 18편의 궁극적인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43절)는 비록 신약성경에서 인용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 사실 로마서 15:9절은 시편 18:49,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를 인용하고 있다. 로마서 15:7 이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시편 18편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왕권을 노래하며, 우리의 소망이 그에게 있다(12절)고 말한다. 따라서 시편 18편의 궁극적 이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

6) 시편 89편: 다윗 왕의 영광과 비하
시편 89편에서는 다윗 왕에게 주어진 모든 은총이 추락하며 전도된다. 시편 89편에서 다윗 왕은 주님의 “택한 자”(bachir), “종”('ebed), “경건한 자”(chasid), “용사”(gibbor), “기름 부음 받은 자”(meshiach), “아들”(ben), “장자”(bekor), “세계 열왕의 으뜸”('elyon)으로 소개된다. 다윗 왕 뿐 아니라, 그의 왕조도 이상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다윗 왕과 그의 왕조는 고난을 당한다. (1) 주님께서 다윗에게 노하사 그를 버리신다(41절). (2) 그의 보좌는 땅에 엎어진다(44절). (3) 그의 원수는 그를 포위하고 노략하고 욕보인다(41-42절). (4) 다윗의 영광은 사라지고 치욕과 질병과 죽음 앞에 서 있다(44, 45, 48절).
전통적으로 교회는 다윗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로 연결시켰기 때문에, 수난의 종의 영상을 제왕시에서 가져와 그 신학적 의의를 살피는 데 실패하였다. 설교자들은 주로 비제왕시로 여겨지는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을 중심으로 수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조명해 왔다. 그러나 제왕시의 애가 부분은 그리스도의 시련과 고난에 대해 더 밀접하고 직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제왕시편에 나타난 왕의 모습은 “영광스럽고” 또한 “고난 가운데 있는” 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양면적인 왕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면적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제왕시의 왕의 이념은 신약 기독론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신약 기독론에서 완성된다. 이 두 계시의 유기적이고 유전인자적인 통일성 때문에, 원래의 의미와 정경적 의미는 서로 상충되지 않으며, 후대의 의미는 이전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의미로서 시편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 없다.

<결론>
우리는 위에서 저주시와 애가 그리고 제왕시 몇편을 중심으로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발판을 마련해 보았다. 우리는 시편의 자연스러운 의미들이 신약으로 넘어가는 발판이 됨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따라서 우리는 풍유적 의미, 예표적 의미, 예언적 의미, 보다 충만한 뜻의 방법을 따라 신약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편 자체 속에 신약을 향해 흐르는 빛이 있으며, 스케치가 있음을 보았다.
또한 우리의 기독론적 해석의 근거가 신약에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신약의 시편 인용을 따라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하였지만, 신약의 시편 인용이 결코 종합적인 것이 아니라, “파라다임적”인 것임을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신약의 시편 인용은 인용된 절 뿐 아니라, 인용된 시편 전체를 기독론적으로 보게 하며, 나아가 인용되지 않은 다른 시편까지 기독론적으로 볼 수 있는 “파라다임”을 제시해준다. 물론 우리는 최종적으로 기독론적 해석을 시도할 때, 구약과 신약의 거리를 충분히 인식해야 하며, 이 때 구약에서 신약으로 더 이상 넘어갈 수 없는 캡슐들은 바다에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우주선의 영상을 빌린다면). 그러나 이 추진체들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구약의 말씀들이 신약으로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저주시와 몇몇 까다로운 애가시들이 그리스도에 적용될 수 있다면, 다른 여러 유형의 시편들까지 기독론적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암시를 계속 해왔다. 예로서 찬양시, 감사시, 신뢰시, 시온의 노래, 여호와의 통치시 등 모든 시편의 형식과 본문에도 기독론적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토라 시편들(시편 1, 15, 19, 119 등)은 그 마지막 모습에서 “모세의 화신”을 그리고 있다. 토라 시편의 시인들은 “모세의 화신”을 통해 구약 성도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신약의 빛 속에서 볼 때, 시편 1편에 나타난 “모세의 화신”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향해 준다. 또한 시온의 노래(시편 46, 48, 87, 126, 137등)의 궁극적인 정신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및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여야 한다.”

http://www.iktinos.org 한국신학정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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