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장

by 이재섭 posted Mar 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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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통장

 

약 오십년 전 일이다. 1965년 3월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겠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설득해 서울 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큰 형이 공들여 지은 충청도 외딴 집을 떠나기가 다소 불안했지만 용기를 내어 길거리에 가족의 운명을 맡겼다. 하지만 여러 달 째 장호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울로 가는 것을 피하려 드는 부모님에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맞아, 돈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가진 돈 없이 서울로 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지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래, 저금을 하자. 그 길 만이 최선책이다.’ 

나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저금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 도장을 몰래 가지고 장호원 우체국을 찾아가  아버지 이름으로 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나는 주로 고물을 주워 고물상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약간의 양식을 사는 외에 거의 모두 저금했다. 우체국을 드나드는 동안 직원들과도 친해졌다. 매일 같이 저금하러 오는 소년에게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우체국에 들어서자 아저씨가 날 향해 소리쳤다.

“0 0 아”

“아니 아저씨, 그건 우리 아부지 이름임니더”

“어이쿠 큰 실례를 했군 그래.  미안하다.”   

“그런데 왜 너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지 않았니?”

“아저씨 도장 맹글 돈 있으면 그 돈도 저금해야 안되겠심니꺼?”

“그것도 참,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럼 너 진짜 이름은 뭐냐”

“재섭이라고 함니더”

“음 재섭이라 그런데 집은 어디냐?”

 “저기 있는데 말 안 할랍니더.”

“그래, 그런데 학교는 안 다니는가 보구나”.

 “예.”  

“.........”

어린 나이에 학교조차 다니지 않으면서 저금하기 위해 우체국을 드나드는 모습이 신기한 듯 아저씨가 자꾸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리 아래 임시로 지은 집이라 말하기가 쑥스러웠다. 초등학교 4학년 중퇴한 이래 더 이상 학교 가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나날이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열심히 고물을 주었지만 소득이 넉넉하지 않았다. 여름이 다가오자 아이스케키 장사가 좋은 수입원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골 아이들 대부분 돈이 없어 장사 또한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물을 받고 아이스케키를 주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마침 고물 시세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고무신이나 병, 긴 머리카락을 가져와도 적당히 값을 계산해 아이스케키를 주었다.

수익을 더 많이 올리기 위해서는 장호원 읍내보다 아이스케키를 집 근처에서 볼 수 없는 먼 시골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시외버스에 올라타고 멀리 갔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날 에워쌌다. 고무신, 병, 고철 아무거나 가지고 왔다.

“아저씨 이거 주면 아이스케키 몇 개 줘유?”

아니 열두 살 소년더러 아저씨라니- 어려보이는 기집애가 아저씨라 부르자 옆에 있던 누나가 “얘, 아저씨라고 부르면 어떡해.” 하고 나무랐다.

시골을 오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몇 개 팔기도 했다. 차장 누나들도 얼굴을 알아보고 선뜻 무임승차를 시켜 주었다. 차비 대신 아이스케키를 주려들면 공짜로 안 받겠다며 돈을 내고 사먹는 누나도 있었다. 장마철에 접어들자, 긴 장마가 계속되어 아이스케키 장사하러 나갈 수가 없었다. 집에 양식이 떨어져 온 식구가 그만 굶게 되었다. 가족회의에서 얻으러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탓에 굶주림을 참고 그냥지내기로 한 것이다.  다리 밑에 살면서도 아무도 밥 얻으러 가지 않기로 한 것이다. 당장 살 집이 없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밥 얻으러 다니는 거지가 아닌 셈이다. 이틀째 굶게 되자 어린 동생은 배고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밥. 밥 줘 잉잉......”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해 별명을 ‘돼지’로 붙인 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저금통장을 만지작거리며 돈을 약간 찾을까 하고 생각했다.

‘안돼, 이것만은......’  일단 한번 결심한 것이 흐트러지게 되면 서울로 가려던 계획이 흔들릴 것 같아 꾹 참고 버텼다. ‘미안하다 진아,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에 가야 한단다.’

비가 잠깐 개이자 얼른 내 사업장이기도 한 <감미당> 아이스케키 집으로 달려갔다.  

“아니, 오늘 같은 날에도 팔러 나갈거니.”

주인  아주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서른 개만 주이소.”

조금만 챙겨 이따금 가랑비가 내리는 장호원 거리를 쏘다녔다.  비를 피해 가게 사이를 이곳 저곳 다니며 소리쳤다.

“아이스케끼....”

“달고 시원한 아이스케키.....”

“어이 케키.”

하고 부르는 소리에 얼른 달려갔다.

“케키 다섯 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줘”

“예 아저씨 고맙심더.”

아이스케키를 사 준 아저씨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만치 있던 남자가 아이스케키를 두 개 사더니 옆에 있던 여자에게 하나 주었다. 나는 서둘러 시장 안에 있는 찐빵 집으로 갔다.    “아주무이요 찐빵 100원어치만 퍼뜩 주이소.”  

아주머니가 솥을 열자 맛있는 찐빵 냄새가 온몸을 향해 왔다. 찐빵 봉투를 받아드니 달콤한 냄새가 코에 가득했다. 나부터 먼저 하나 먹고 싶었지만 참고 아이스케키통을 맨 채 집으로 갔다. 봉투 째 동생에게 찐빵을 주자 너무도 반가와 싱글벙글하며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다.  엄마가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동생에게 말했다.

“얘, 형도 주래이. 형도 밥 안 먹었데이.”

동생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찐빵 한 개를 꺼내 내게로 내미는 것이었다.

“응, 형도 하나 묵으라” 

동생에게서 찐빵을 받아들고 그 손에 아이스케키를 하나 들려주었다. 찐빵이 입속에서 녹아내리듯 감미로운 맛을 내는 동안 다시 거리를 쏘다녔다. ‘조금만 참아라.  진아, 내가 꼭 널 서울로 데리고 가서 학교에 보내 줄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이라도 빨리 끓여 먹어야 할 것 같아 양식을 조금 샀다.

  나는 가족도 소중했지만 동생 진이를 생각하면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이듬해 3월에 진이를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저금통장이 날마다 빨갛게 물들어 갔다. 나중에는 새 통장으로 갈아야 할 만큼 자리를 메워 나갔다. 하지만 저금을 하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었다. 그야말로 희망이 실린 저금통장이었다.

 동네에 서커스단이 와서 요란스럽게 광고하고 다녔다. 평소 돈을 무척 절약했지만 동생과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가기로 했다. 늘 집에만 있는 동생에게 무언가 흥미로운 일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커스 장 안에 들어서자 나도 처음 보는 동물들이라 놀라웠다. 책에서만 보던 동물들이 많이 보였다. 코끼리, 낙타, 호랑이, 원숭이, 훈련된 하얀 개들도 있었다. 커다란 낙타가 주인을 등에 태운 채 차례차례 일어서는 게 신기했다. 

추석 하루 전, 드디어 우리 가족은 서울로 출발하기로 하고 장호원을 떠날 차비를 했다. 대목을 앞둔 장날이라 시장 전체가 사람들로 꽉 찬 것 같았다. 충청도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보신탕 식당을 하는 주인집으로 우리 식구 모두 인사드리러 갔다. 뚱뚱한 주인 아주머니가 서운한 듯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제.  서울로 가거들랑 부디 잘 살으래이.”

“아주무이요. 그동안 정말 고마웠심더. 많이 파시소.”

주인  아주머니는 아버지에게 보신탕을 한 그릇 드리면서 옆에 서있던 내게 물었다.

 “얘, 너도 이거 먹겠니?”  

 “난 그런 거 안 묵을랍니더.”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야, 보신탕이 어떻다고 그러냐. 몸에 좋은 거란다.”

엄마는 파출부로 일하던 주인집에 인사를 다녀오셨다.

 

‘드디어 저금을 찾는 거다.’ 비장의 결심을 하고 살그머니 아버지 도장 꺼내고 저금통장을 챙긴 후 엄마에게 말했다.

“어무이요. 내 어디 잠깐 갔다올 데가 있으니 여기 가만이 계시소.”

집을 나서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우체국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쳤다.

“아저씨 저금 찾으러 왔심더.”

모든 직원들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금을 찾는다고- 얼마큼이나?”

아저씨가 놀라서 물었다. 한 번도 저금을 찾은 적이 없었던 탓에 신기하게 생각된 모양이다.

“예, 몽땅 주이소.” 

나는 숨이 찬 채 대답했다.

“뭐 몽땅......  어디다 쓰려고...... ” 

아저씨는 무척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 아저씨, 우리 서울감니더. 그래서 저금한 거 다 찾으러 왔심더.”

우체국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안 돼.”

“아니, 왜 안됩니꺼. 내 돈 내가 찾는기라요......”

“그래도 안 돼.”

“서울간다 안캅니꺼. 이 돈이 꼭 필요함니더.”

“야 이놈아, 그 동안 어떻게 모은 건데 그렇게 불쑥 와서 다 찾아간단 말이냐. 안 돼, 절대 못 내준다.” 

아저씨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와 그람니꺼, 아저씨, 내꺼 잖아요. 아저씨, 서울 갈 때 쓸라구 모은 거란 말임더.”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 버렸다.

“그럼 가서 네 엄마 불러와.”

나는 어깨 힘이 빠진 채 엄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울먹였다.

“어무이요, 우체국에서 내가 저금한 거 안 준다카네요.”

“아니, 왠 저금을...”.  

엄마가 놀라서 물었다.

“서울 갈 때 쓸라구 몰래 모아 둔 게 있단 말임더.  엄마랑 같이 오라카네요.”

“......”

  엄마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울가자는 내 말을 자꾸 미루어다보니 이렇게까지 하나보다 생각하신 듯-.  열두 살 아들의 기지에 많이 놀라셨나 보다.

엄마와 함께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아! 이 아이 어머니 되십니까.  제발 부탁인데 저금만은 찾지 말아 주십시오.” 

아저씨는 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선 얘가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건지 아십니까?”

엄마는 할 말이 없는 듯 듣고만 있었다. 아저씨는 무거운 아이스케키 통을 맨 채 수없이 우체국을 드나들던 소년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어 못내 아쉬운 것 같았다.

“대신 서울로 가시게 되면 그쪽 우체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린 주소도 없이 그냥 무작정 길을 떠나는 거라예......”

 “얘도 아마 서울 갈 때 쓸려구 저금한 모양인디.......”

“아! 그러세요. 그럼 드려야죠.  저축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데 그만 갑자기 와서......”

아저씨가 주는 돈을 받으니 마음 한 편이 든든했다.

“아저씨 고맙심데이.”

  우체국 직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온 듯 우리에게 인사했다.

“서울 가면 꼭 편지해.”  

우체국 급사 누나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부디 잘 살아야 해.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아저씨가 눈시울을 붉혔다.

“학교도 다시 가고......”

“예, 아저씨 안녕히 계시소, 누나도 잘 있어요.”

   돈을 모두 엄마에게 드리고 우리 짐이 있는 시장으로 돌아왔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중간에 머물지 않고 서울까지 곧장 가는 거다’.   ‘가자. 서울로-’

아버지가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내가 뒤에서 밀었다. 이따금 내가 리어카를 끌기도 했다.  일곱 살 난 동생은 걷다가 힘들면 리어카 위에 올라탔다. 엄마는 막내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옆에서 걸었다. 우리 가족은 흙먼지 나는 비포장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한 가족의 꿈을 실은 리어카는 조금씩 서울 쪽으로 움직였다.

서울 도착 후 우리는 나중에 신길 전철역이 들어선 다리 아래 판잣집을 지었다. 공들여 저금한 돈이 요긴하게 쓰였다. 얼마 후 판잣집이 철거되면서 사당동 철거민촌에 입주하게 되었다. 성경구락부를 운영하는 교회 천막학교를 찾아가자 우리를 반겨주었다. 서울로 가서 동생을 학교에 입학시키려 들었는데 나까지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덤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정규학교로 편입해 우등으로 졸업했다.

스무 살 되던 해 인생의 진로를 생각하다가 목사가 되기로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목사가 된 나는 결혼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가족 모두 십 수 년 동안 선교사 생활을 하고 돌아왔다. 그 사이 큰 아이가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다른 두 아이는 박사 과정에 다니고 있다.

수요일마다 노숙자 쉼터 교회에서 가서 설교를 한다. 이따금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하고 작별 인사하시던 장호원우체국 아저씨 말이 떠오른다.

(My Self Story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