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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라 내가 너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우리 가족을 안내하기로 한 자는 자신의 동생이 1월말까지 꼭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예비군 관계로 꼭 한국에 와야 한다며 그전에 우리가 현지로 가서 교회를 인계받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다.
 결국 큰 아이 기은이의 경우 초등학교 2학년 종료를 한 달 앞두고 추위가 극성을 부릴 때 머나먼 겨울 나라로 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C단체 총무인 이 장로로부터 소개받고 박00을 처음 대할 때부터 그의 성향에 의아심이 갔다(얼굴에 음흉한 빛이 서려 있어 보였다).
 아이 엄마는 “박00을 만나보니 사람의 인상이 안 좋아 보인다.그의 말을 믿고 어린 아이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불안하다”며 걱정했다.

이 말을 듣고,“그래도 신분(면직 처분되었다고 들었지만)을 믿어야 할 것이 아닌가.”하고 나무라기도 했다. 나또한 박과 초면이었지만, 러시아권에 비교적밝다는 C단체 총무 장로가 소개를 한 인물인데다 이미 현지 선교사로 4년 반을 지냈다는 말에 그의 말을 무조건 믿기로 했던 것이다. 

선교사로 나가려면 책을 좀 가져가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자 자기 책이 많이 있으니 이걸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사람을 믿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는 이때까지만 해도 선교사로 일한다는 것은 모두 대단한 희생 정신을 가진 자로 보았다.

박은 본래 K단체에서 1992년 2월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파송되어  알마타 서쪽 약 1,200km 떨어진 끄즈오르다 지역에서 4년 반 동안 선교사로 활동했는데 건강상 한국에 들어와 쉬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박은 선교협정서란 것을 가지고 와서 사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게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우리를 보다 확실히 지원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가 무언가 관리하는 인상을 풍겨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박00이 내게 준 선교회보에 자신이 고려대 지리학과 중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2년을 다녔다고 들은 것 같다). 그래서 중퇴라는 표현이 좀 어색해 보였지만 고대를 다닐 정도로 엘리트처럼 생각되었다. 이 자의 거짓말로 인해 여러 차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된 후 그의 말을 역추적해 보기로 했다.
고대에 전화로 이런 자가 다닌 적이 있냐고 묻자 한 학기만 이수해도 영구적으로 기록이 남는다. 아마 이 자는 고대를 전혀 다닌 것 같지 않다고 답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P선교회에 제출한 이력서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의 이력서 기록에 거짓이 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속 품고 있다. 이런 것까지 거짓으로 날조해야 했을까. 그래도 이 자를 믿고 후원하는 자들이 있고 품고 있는 선교단체가 있으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이때 나는 I단체에서 몇몇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었던 탓에 이곳 소속으로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C단체에서는 언어훈련을 받은 탓인지 협력선교사로 해두었다.
따라서 C단체 총회 격인 연초 모임에 참석해 김 교수님을 비롯해 관계자들과 두루 인사할 기회를 가졌다.

  박00은 단지 우리가 생활할 정도의 지원만 있으면 교회는 자신이 운영비를 대겠다고 말한 바 있어 후원이 다소 부족해 보였지만 믿음으로 대처해 나가기로 했던 것이다. 
  짧은 준비 기간이었음에도 많은 분들이 후원에 동참해 주어 감사했다. 대개 초교파적으로 주위에서 조금씩 후원이 들어왔다. 

  오영약국 여 장로님은 여러 가지 비상 약품을 챙겨 한 상자 꾸려주셨다.이때 박과 약국 앞에까지 동행 했던 탓에 장로님께 인사드리러 들어가자고 해도 굳이 피하는 것이 이상했다(결국 이 약을 가지고 박의 집에 같이 갔다가 두고 왔는데 선교지로 나올 때 안 가지고 왔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또한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교지에서 사는 동안 꼭 필요했을텐데-).

  심지어 박은 우리 가족 파송예배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들었다.  왜 그가 철저히 자신을 감추는지 의아심이 갔다. 과연 그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고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박은 또 내게 자신을 파송했던 K선교회 측 사람들을 만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들은 선교에 혼란만 주는 사람이라 공연히 마음만 어지럽힐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식구 다섯 명은 가진 것도 별로 없이, 더욱이 선교지를 사전 답사할만한 여유조차 갖지 못한 채 박00의 인도에 따라 생면부지의 땅을 향해 떠났다(박의 말에 현지에는 화장지도 없고 A4용지도 구할 수없다고 하기에 컴퓨터가 무용지물이 될까봐 A4 용지까지 몇 권 챙겼다).

 마침내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조그만 비행기를 탔다. 중도에 몽고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기름을 넣고 다시 비행하는 것이었다.
 약 7시간 정도 비행하도록 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이 없었다.어린 자녀 3명을 동반한 한 가족을 인솔하면서도 무언가 마음에 짐이 있었던 모양이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이때 혹 입국이 거부될 수도 있는 상황인데다 아이들까지 인솔하는 것이 가책이 되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선교지인 카자흐스탄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과연 어떤 삶이 펼쳐질 것인가. 낯선 땅에서 생각지 않은 위험은 닥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었다.

  알마타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밟는 동안 박은 우리 가족 중간에 끼어 들어 입국하는 모습이 좀 이상해 보였다. 무언가 쫓기는 듯한 그의 몸가짐을 보면서 선교지에 오래 살아온 사람답지 않게 느켜졌다.
 도착하는 날 알마타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많이 쌓인 탓인 지 우랄스크로 가는 비행기가 자꾸 지연되고 있었다.  

 불편한 호텔에서 사흘 간이나 머물러야 했다. 그 사이 박0곤은 이따금 혼자 알마타 시내를 다녀오면서 굳이 나와 동행하지는 않는 것이었다. 내게 할 말이 없었던지 시내에 검문이 심해 자칫하면 검문에 걸려 안좋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함부로 시내로 같이 나가는 게 위험하다고 했다.이제 먼 길을 떠나야 하는데 굳이 가두어 두는 것이 이상했다.

  한 식구가 외국에서 상주하려면 한국대사관에 거주 등록도 하는 게상례인데 아예 같이 시내로 같이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0곤은 알마타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을 인솔해온 것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도둑이 제발저리다는 말대로-

  마침내 우랄스크로 향하는 비행기가 떠난다는 불이 들어왔다. 짐을 부치려고 먼저가던 박이 내게 오더니 함께 짐 실으러 가자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했더니 이 나라 비행기는 짐 값을 따로 내고도 자기 짐을 모두 직접 비행기까지 들고가 화물칸에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법도 다 있냐고 했더니 다시 갔다가  조금 후에 오더니 짐꾼들에게 부탁해서 300불만 주면 대신 비행기까지 짐을 실어주기로 했다면서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안내자를 의지해 온 상태라 그가 말하는 것이 다소 모순이 있어 보여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어느 항공사가 승객더러 화물칸에 짐을 직접 실으라고 요구할까- 황당한 말로 들렸다.
(나중에서야 우리를 상대로 이렇듯 거짓말로 돈을 우려내 간 것을 알게 되었다.선교사로 나서겠다는 목사 가족을 상대로 이래도 되는 것일까).

알마타에서 목적지인 우랄스크까지는 다시 약 2,800km 떨어진 탓에 국내선으로 3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우리는 이 먼곳까지 자청해 나선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쳐왔다. 온 천지가 눈에 싸여 나무고 땅이고 온통 하얀색인 그야말로 눈의 나라였다. 이곳이 주님께서 우리 가족을 인도한 땅이었나 보다 하고 주어진 직무에 충실하기로 다짐했다.

 박이 미리 알고 있던 현지인들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겨울 나라임에도 사택으로 배정된 집은 낡은 탓인지 싸늘하기만 했다.  이제 눈의 나라인 우랄스크에서 우리 가족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낙후된 지역이라 반찬 거리부터 쉽지가 않아 보였다.

박과 함께 교회를 출입하면서 이상스러운 것은 자신보다 훨씬 연장자인 내가 와 있음에도 모든 일마다 주인 행사를 하려 들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가 자못 이상스러웠다. 나는 과연 들러리인가.

 심지어 어느 주일날 갑자기 세례식을 거행하면서 정작 내게 자기 옆에서 물을 들고 서 있으라는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열심히 사진을 찍는것이 아마 어디로 보내려고 한 것 같다.

 현지 교회를 물려주기로 해서 멀리서 나이든 목사 가족이 왔는데도 나를 뒤로 한 채 금방 한국으로 돌아갈 자가 세례를 주어 이상했다.
더욱이 예배 때마다 집례 하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되었다.담임목사로 맡기고 자신들은 철수한다 해서 그 멀리서 오지 않았나.
앞으로 며칠 있으면 부활절이었던 만큼 굳이 서둘러 자신이 주도해 세례식을 거행하지 않아도 나중에 내가할 수도 있는 일로 생각됐다.

 며칠 후 박의 주문으로 박의 동생과 함께 현지 고려인협회장에게 인사드리러 갔다(이때도 박 자신은 빠져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나중에야 박이 철저하게 자신에게 곤란한 자리는 피해 왔음을 알게되었다(그러고 보니 물건 인수 명세서도 대개 자기가 사용하던 것임에도 굳이 동생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막상 사무실을 들어가자 고려인협회장이 고개를 돌려 외면하더니 나올 때까지 아는 척을 안해 무안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순간이었다.
그 멀리에서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다니-(아마 고려인협회장이 이들 형제에게 무척 실망한 상태에 있었던 모양이다).

  현지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은 주일 예배 때, 생각지 않은 분들이 교회를 찾아왔다.주로 고려인들이었는데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이 찾아 와서인지 박00의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알고 보니 이분들은 바로 박 형제의 만행으로 교회를 떠났던 교회 설립 대표와 개척 당시에 수고했던 알라 선생님 등 몇몇 고려인들이었다).

이분들은 한국에서 새 목사가 온다는 사실을 듣고 3년 만에 교회를 찾아나선 것이었다. 후일 이분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선교지에서주어진 몫을 나름대로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2월초가 되자 박은 교회 임대료와 밀린 직원 급료를 주는 것이었다(아마 이 때문에 우리를 1월말까지 서둘러 도착하게 한 것 같았다). 박은 우리에게 받은 돈임에도 자신이 직접 임대료를 내고 직원 급료를 주므로 주인 행세를 하려 들었다(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대개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오는 가에 따라 복종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건 인수비라고 받아 엉뚱한 곳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것이다.

  그는 또 동생 예비군 문제로 1월말까지 우리더러 현지에 꼭 도착해야 된다고 누누이 강조해 한 겨울에 어린 자녀와 길을 떠나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2월에 접어들어도 그의 동생이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이었다.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가 정직이란 단어를 알고 있는 것일까 의아심이 갔다 (그동안 예비군이란 말이 현지로 유도하는데 가장 골자가 되었음에도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는 꺼낸 적도 없다. 우리가 선교지로 가고 싶어 하기에 단지 안내만 해주었다고 발뺌했다). 

  어느 날 박이 사라 선교사에게 자신의 가방에서 무얼 찾아 갖다달라고 했다. 그래서 가방을 찾던 중 이상한 편지가 있어 읽어보았다고 한다. 한국의 미문교회 S목사님께 보내는 글인데, 우리가 온 이야기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에게 물려주고 철수하기로 되어있었음에도 자신의 동생이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고 되어 있어 놀랐던 모양이다. 

  밤에 사라 선교사는 놀라서 내게 말했다.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냐며가서 따져 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현지어도 전혀 못하는데다 측근자도 없고 심지어 경비조차 넉넉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라 선교사에게 외지에 온 만큼 일단 함구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우리에겐 어린 자녀까지 같이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이제부터 그의 정체를 찬찬히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는 한 가족을 이곳까지 불러다 놓고 어떤 결과를 기대했단 말인가. 비싼 경비를 들여 선교 여행을 온 것도 아닌데- 
이를 기회로 박은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를 담임했던 박 목사님을 비롯하여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님께 보내는 여러 장의 선교 편지도 가지고 있었다(잠시 다녀가면서 이처럼 한국에 선교편지를 보내 선교비를 받아내려 든 것이다).

  마치 낚시를 하듯이 무작위로 후원자 교섭을 펴 나가다가 이따금 대어(?)를 낚기도 하나 보다(이런 자로 인해 한국 교회가 점차 선교사를 불신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을 내세운 사기극이 아닌가).

  선교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외국에서 일어나는 이들을 어떻게 한국 교회가 일일이 알 수 있을까. 이런 현지 상황을 계속 묻어만 둔다면 암처럼 번져 끝내 회복하기 힘든 정도로 되지 않을까. 그런데도 일부 선교 단체는 측근 자 위주의 선교를 펴고 자기 사람이라고 무조건 옹호하고 있다.

  박은 자신보다 7살이나 많은 목사를 데려다가 이렇듯 우롱하기 시작한 것이다.더욱이 나어린 자녀들을 담보로 해서-
(우리는 피해 당사자이다. 따라서 박00의 실명을 공개해도 무방하겠지만 최소한의 예를 지키기 위해 이름을 덮어 둔다. 그는 이따금 우리 동태를 살피면서도 사과나 보상을 위해 노력한 적이 없다. 대신 내 태도를 문제삼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어이가 없다.

선교사를 후원하거나 관심을 가진 분들은 선교 현장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의 내용보다 사실 유무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지구 한 편에서 발생한 일을 사실 그대로 써 나가기로 했으니.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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