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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내가 너를 어디로 보내던지 너는 가며.

 작은 임대아파트 베란다, 이곳은 내가 자주 기도하던 골방이었다.
주님과의 긴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나만의 공간이기도 했다. 기도는 신앙인의 원동력이다.

“내가 너를 선교지로 안내할 사람을 보낼테니 무조건 따라 가라”는 감동이 자주 왔다.

 무언가 일이 곧 생길 것 같았다. 이제서야 선교지로 갈 때가 되었나 보다. 세계 지도 펴 놓고 기도한 지 20년이 지난 터였다. 구체적으로 선교에 나설려고 한 때부터 10년이 지나 젊은 날로 보기 어려운 때였다.
모세를 80세에 부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주님께서는 잊지 않고 나를 부르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조금 있으면 한국에 큰 환난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는 응답도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IMF라는 엄청난 경제 환란이 한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1996년 여름, C단체에서 러시아어 언어훈련을 한다는 말이 매스컴으로 들렸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선교지에 나갈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는 만큼 일단 어학 훈련이라도 해 두자는 생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소한 러시아어를 조금이라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선교사 지망생들 수 명과 3개월간 계속된 언어훈련을 받게 되었다.

  C단체 총무인 이 장로(이하 총무로 표기)는 훈련생을 모두 선교지로 보내야 한다는 부담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단체 사무실에는 여러 층의 사람들이 방문할 때가있었는데 그 가운데 “박00”이란 자가 있었다.
 박은 연세가 높은 총무에게 자꾸 선교사로 나갈 것을 요구했다.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우랄스크에 좋은 선교지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사둔 집이 있는데 싸게 드리겠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자주 대화가 오갔던 모양이다. 박을 가리켜 목사라고 부르지만 그의 인상이 썩좋아 보이지 않았다(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시일이 지나면서 그의 진면족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때 박00은 총무에게 우랄 강이 가까이 흐르는데 고기가 많아 낚싯대 하나만 들고 가면 여생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총무는 내게 그동안 박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는 나이가 너무 많고 가족 또한 현지로 가는데 어려움이 많으니 자기 대신 날더러  그쪽으로 가지 않겠냐며 선교지 진출을 권했다.
  비교적 러시아권에 밝아 보이는 선교 단체 총무 장로님이 중재하기도 한 만큼 일단 박을 만나 선교지에 대한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며칠 후 그를 만났다.

  박00은 내게 자신의 동생이 평신도이지만 현지에서 러시아 여자와 살면서까지 선교하다가 여건상 철수하게 되었다고 했다(이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선교에 열정이 많은 청년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알게 된 후 많이 놀랐다)

“자기 동생은 그 동안 예비군 훈련을 많이 빠져 1월말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으면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라며 걱정하기에, “나도 예비군을 다 거쳤지만, 아무리 예비군 대상자일지라도 외국에 나가 있는 자에게그런 식으로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비군 중대본부에서 그때까지  안 오면 큰일난다 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의아심이 많이 갔지만 그래도 선교사까지 지냈다는 신분을 고려해 믿기로 했다. 

  내가 카자흐스탄 점차 선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동생이 선교지에서 철수해 한국에서 살아가려면 비용이 많이 드니 그가 사용하던 물건과 살던 집을 인수해 주겠냐고 부탁했다.

  러시아 여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한국에서 비자를 잘 안 내주기 때문에 당장 데려오기 어렵다. 그래서 여자 쪽 생활비도 좀 주고 와야 한다고 말했다. 평소 남이 어렵다면 지나치기 힘든 내게 심적 부담이 왔다.

  박은 카자흐스탄은 중고나 신품이 큰 차이가 없다며 물품 가격표까지 만들어 제시했다. 내가 급히 선교지로 떠나자면, 후원자 모집도 쉽지 않고 책이나 필수품을 구해 가지고 가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필수품 자신들의 것을 구입하면 거의 해결될 것이고 책은 자기가 두고 온 것을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또 나를 안심시키려 한 듯, 자신에게 들어오고 있는 선교비가 있는데 매월 약 500불 정도 드는 교회 운영비를 대신 부담해 주겠으니 우리 먹을 것만 모금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선교를 준비해 온 자로서 이왕이면 선교를 하다가 어려움에 싸인 한 청년을 구할 겸 선교가 잘 안되고 있는 지역으로 갈 것을 검토하게 되었다

  선교사로 나가 현지에서 수년 간 언어훈련 기간을 갖기에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사역의 기회가 있을 때, 현지에서 나름대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언어 훈련을 병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욱이 후원자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데 자신들이 선교지를 철수하는 대신 얼마간의 선교비를 지원하겠다는 말에 관심이 갔다). 

  박이 집 값으로 10,000불을 내야 한다기에 형편상 어렵다고 미루고 대신 물품비로 5,000불을 요구하기에 이중 4,000불과 초청 경비로 500불을 지불키로 했다.
  그는 이 돈을 굳이 한국에서 달라고 했다. 적지 않은 돈인데 현지 사정도 모르고 돈까지 미리 지불하게 된 것이다(부친이 어렵게 마련해 준 돈으로-) . 
난 그저 믿음으로 모든 일이 잘 진행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무렵 G목사님께서 교회 학생회 지도목사로 임명한 지 몇 달이 못 되었다. 또 중요한 과제를 작업 중이었는데 아직 마무리가 덜 되어 선뜻 멀리 떠나기 곤란한 입장이었다.

  선교지 상황이 급박하다는 말에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서둘러 현지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이때까지 나는 선교사 신분을 가진 자는 모두 인품과 신앙 인격이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일단 G목사님께 아무래도 급히 선교지로 가야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선교사로 있다가 자기 선교지에 있던 것을 이것, 저것 팔아먹는 못된 놈들이 많이 있다. 그러니 혹시 금전 거래 같은걸 요구하면 아예 상대하지도 말고 그런 곳이라면 절대로 갈 생각을 말라.”고 당부했다.

 혹시 반대하실까봐 기공이가 요구한 내용에 대해 아무 말씀을 안 드렸는데도 선교에 관해 많이 접한 분이라 그런지 내심 마음이 걸리셨던 모양이다. 사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서둘러 떠나서는 안될 입장이었다.

  하지만 기도할 때 ‘선교지로 안내하는 자를 무조건 따라가라.’고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적지에라도 가야 하듯이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는 다소 모험도 감행해야 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래서 불안을 씻고 현지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이 엄마에게 내가 개인적으로 결정한 일이기도 하고 아직 겨울인 만큼 먼저 가서 상황을 보고 연락할테니 몇 달 뒤에 아이들과 함께 오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너무 먼 길이고 다시 한국에 가족을 데리러 올 만큼 여유가 있는 형편도 아니지 않는가.  한국 비행기가 바로 닿지 않는 곳을 자기 혼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며 처음부터 같이 따라나서겠다는 것이다.

  부친께서 따로 모아 둔 돈 전부라며 300만원을 주겠다는 말씀이 있었다. 하지만 부친을 모시고 있는 측근자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집을 찾아온 나를 무척 나무라는 것이었다. 어른한테 보태주지 못할망정 있는 것마저 가져가려 든다고 나무라기에 그냥 돌아왔다.

 이튿날 부친께서 멀리 가는데 한 푼이라도 더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다시 건네 주셨다. 모금된 선교비를 박에게 건네 주는 것이 왠지 부담되어 부친을 비롯해서 측근자로부터 받은 돈 4,500불을 지불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앞으로 우리가 쓸 것이 부족해 보였다. 

  평소 남이 어렵다면 피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선교지에서 어려움을 당했다는 한 청년을 구하려는 의지가 곁들여진 결정이었던 것이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는데- 좋은 맺음이 되기를 기대했다.

  박은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양쪽 가족이 모이는 상견례 자리도 만들었다. 앞으로 선교지를 잘 지원하려면 서로 얼굴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 

  박의 동생은 미리 가서 우리가 오기 전에 준비할 게 있다며 선교지로먼저 갔다(나중에서야 이들 형제가 우리를 이용해 얼마나 거짓과 술수로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든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믿는 일이 이처럼 어려운 것일까-).

  약 1달이 걸려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초청장이 도착했다. 박00은 처음 비자 신청을 할 때 나와 같이 카자흐스탄 대사관을 같이 가더니 막상 여권을 찾는 날에는 주민등록증을 내개 주며 나더러 대신 자기 여권을 찾아달라고 하기에 그의 여권을 대신 찾아주면서 본인이 아닌데도 여권을 선뜻내주는 대사관도 다 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겨울 나라를 가려면 순간적인 추위로 인해 어린 아이들에게 지장을 줄 것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박에게 추운 나라라 4월은 되어야 안전하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반드시 현지에 1월말까지 현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왕 남을 돕기로 한만큼 자녀들을 희생해서라도 가기로 했다.

(우리 가족이 선교 현장에서 당한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연재해 나갈 생각입니다. 혹 이 글에 대해 의문이나 건의할 말이 있으면 연락바랍니다. 공개적인 자리인만큼 독자의 정서를 고려해 좋지않은 내용은 다소 축소해 쓰려고 합니다. 선교사 가족이 선교 현장에서 당한 고통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선교사에서 살아온 가족과 공감대를 갖고 기도와 격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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