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this page
2011.05.15 03:17

러시아 선교 재고찰

조회 수 269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러시아 선교 재고찰
한국이 러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한지도 이미 10여년이 지났다. 한 동안 러시아 선교 붐이 한국 교회에서 일어났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열기가 사라졌고 현재 러시아에 주재하는 선교사 수도 무척 줄어들었다. 특히 IMF사태 이후 한국 선교사들이 러시아에서 많이 철수했다.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교사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미국 다음 세계 두 번째로 많은 수의 선교사를 파송 하고 있는 사실과 대조된다. 이제 한국 교회의 러시아 선교에 대해 고찰할 때가 온 것이다.
종래 우리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꺼렸다. 한국 교회는 선교학이 말하는 일반적인 원칙보다는 주로 개교회주의가 주는 선교 전략으로 러시아 선교 문제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입장에서 한국 교회의 러시아 선교 문제를 분석하고 어떤 전략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사진: 러시아 침례교단의 노회 정회원으로 참석한 장 창수선교사) 여기에 한국 선교사 자신에게서도 그 원인이 찾아진다. 한국 선교사들도 원칙보다 열정에 근거 하여 러시아 선교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객관적인 평가를 시도하려 해도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이 이를 싫어했다. 선교 열정에 찬 물을 끼얹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열정도 사라졌기에 그리고 차분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좀 생긴 것 같다. 그럼 한국 교회의 러시아 선교의 문제는 무엇인가? 
한국 교회의 문화를 이식한다.
러시아에 주재하는 대부분의 한국 선교사들은 한국식 교회를 선교지에 개척하여 세우려 한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의 정서나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예배 문화를 그대로 러시아 선교지에 이식하려고 교회 개척을 시도했다. 이것은 이미 20세기 이전 서구 선교사들에 의해 행해진 문화 제국주의적인 선교방식으로 선교학은 이의 잘못을 이미 선언했다.
한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의 예배와 목회는 한국식으로 진행된다. 한국 선교사들은 비교적 개방적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목회를 한다. 이것은 러시아 현지인 교회의 비교적 폐쇄적인 인상을 주는 예배 분위기와 대조를 보인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를 지적하며 현지 교단과 협력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지인 교인들 가운데서도 딱딱한 예배 분위기가 싫어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로 옮기기도 한다. 좀 더 열린 예배 스타일이 불신자들을 더 쉽게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로 유인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우선 현지인 목회자나 교인들이 보기에 한국 선교사들의 예배가 너무 가볍고 진지하지 못하다. 예배가 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말씀이 빈약하다는 비판도 포함된다.
이들이 열정적인 예배를 멀리하는 이유가 있다. 구소련 시대 지나치게 열정적이며 인간 심리를 자극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사회를 혼난 시킨다고 법적으로 이들 교회들이 사이비 종교로 낙인 찍혔다. 이런 전례를 본 러시아의 주류 침례 교회들은 감정적인 요소를 지극히 억제 시키고 말씀 위주의 예배를 드려 왔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에서 이들의 예배 전통은 다소 굳어졌다. 그리고 예배 중 교인들의 얼굴 표정도 항상 굳어있다. 물론 구소련 시대 신앙으로 핍박을 받았기에 항상 긴장해야 했을 것이다. (사진: 러시아 침례교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양성 학교 개학식) 이런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 선교사들은 이들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들의 것을 거절했다. 한국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예배용 찬송가나 복음송들을 노어로 번역했다.  물론 장조의 찬송가들은 비교적 밝고 힘차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의 한국 찬송가들이 미국이나 서구 유럽 교회의 것들임을 잊고 있다.   결국 번역 시도는 한국 교회의 찬송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 교회의 찬송가를 제일 좋은 기독교 음악이라고 소개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오래 전 서구 선교사들이 이미 시인한 잘못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들 현지인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와 복음송들도 못지 않게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찬송가들이 단조로 불려지어 다소 슬프고 느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문학과 예술의 나라로 성시들이 대단히 많고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이들 성시를 교회 음악용으로 예배용으로 작곡한 성가곡들도 많다.   장조 찬송가에 익숙한 한국 선교사들이 보기에 어둡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이 그들의 정서였다. 그러므로 우리와 정서가 다르다고 이들 것을 단순하게 무시하고 미국이나 서구 유럽 교회의 밝고 힘찬 찬송가를 소개하려는 시도는 너무나 정당치 못한 형제 사랑이다.
이들 러시아인들은 서구 문명에 대해 이중 잣대를 갖고 있다.  이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비판적이다.  서구 유럽보다 뒤진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구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독특한 민족주의가 서구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게 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가 유라시아에 속하기 때문이다.  서양과 동양이 혼합되어 무조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지만 않는다.   이런 민족적인 기질을 감안한다면 한국 선교사의 서구 교회 편향적인 찬송가의 노어 번역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다양한 찬송가들을 러시아 교회에 보급한다는 면에서라면 바람직하다.  이런 정신이 있다면 선교사들은 현지인 교회의 찬송들을 배우고 자신의 교회에서 부르면서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며 서구 교회의 찬송가도 보급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한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 삶을 산 현지인 교인들은 현지인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사정상 선교사들은 갑자기 자신이 세운 교회를 떠날 수 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는다. 갑자기 교인들은 자신의 출석 교회를 잃는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인 교회에 출석하거나 소속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선교사의 교회에서 그의 목회와 예배를 통해 가르침을 받으며 현지인 교회와는 완전히 이질화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간다. 설사 그 교회가 현지인 교단으로 넘겨진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들 교인들이 새로운 교회 지도자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선교사들이 세운 다른 교회로 가거나 아니면 세상으로 되돌아 간다. 이곳 ‘노보씨비르스크’시에도 갑자기 미국 선교사가 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침례교회로 이명하려 하지 않았다. 보수적인 교회 분위기가 싫어서 였다. 이 선교사의 교회에 등록한 신자들이 방황하다가 교회 출석을 그만 두었다. 때때로 사정상 교인들이 선교사가 세운 교회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 교인들은 선교사가 세운 교회를 찾을 수 없다. 이 때 이들은 당연히 현지인 교회를 찾아 출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인 교회 출석을 꺼린다. 위에서 말한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이들도 세상으로 돌아간다. 참 이것은 간과할 수 심각한 문제이다. 선교사의 모든 사역 결과가 잘못된 교회론과 선교 전략으로 인해 결국 수포로 돌아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선교사들이 현지인의 정서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특정 민족이나 특정 사람의 정서만 존중하고 다른 민족이나 다른 사람의 정서를 무시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진정한 형제 사랑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선교사를 축복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은 첫 선교사로서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절)
독립 교회를 세운다.
한국 선교사들은 여전히 문화 제국주의식의 선교를 고집한다. 그 결과 한국 선교사들은 현지 러시아 개신교 교단과 관계가 단절된 가운데 사역한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이 외국 선교사에 대해 배반감과 동시에 위화감을 느낀다. 처음 외국 선교사들은 러시아에 입국하기 위해 현지 개신교 교단의 초청을 받아야 했다. 이들은 기쁘게 초청하고 잘 정착하도록 선교사들을 사심 없이 도왔다.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현지에 정착하면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현지 교단과 거리를 두고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지인 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외국 선교사와 함께 현지 교회를 떠났다. 이에 현지인 목회자는 배반감을 느낀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며 현지인 목회자는 외국 선교사라면 처음부터 불신하고 배척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느 정도 정착한 선교사들은 파송 교회의 도움으로 예배 장소를 위해 큰 홀을 임대하거나 교회 건물을 쉽게 마련한다. 그리고 복음 전도를 위해 선교사들은 많은 물질을 쉽게 사용한다. 외국 선교사들의 재정적인 씀씀이가 더 커서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보다 재정적인 면에서 덜 얽매인다. 외국 선교사들의 이런 것들을 보며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두 가지 심리 작용이 일어난다. 한편 부럽지만 다른 한편 이들 선교사들이 순수한 복음이 아닌 물질로 영혼을 사려한다면서 적대감을 갖는다. 이렇게 이들 현지인 목회자들은 외국 선교사들이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선교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선교사들과 현지인 목회자사이 관계는 더욱 소원해진다. 자연스럽게 러시아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개신교 교회와 현지인이 목회하는 개신교 교회, 둘로 나뉘어졌다. 같은 개신교에 속하면서도 이들은 선의의 경쟁이 아닌 적대적인 싸움을 하게 된다. 우리는 한국 선교사들의 활동이 중국 교회를 여러 갈래로 분열시켰다는 사실을 이미 익히 알고 있다. 중국은 정부가 종교를 관리하기에 중국 교회는 하나였다. 그러나 개교회 성향이 강한 한국 선교사의 등장으로 중국 교단은 분열되었다. 이런 일이 러시아 선교 현장에서 재현되고 있다.
러시아 교인들이 둘로 나뉜다는 것은 앞으로 있을 심각한 문제를 예견하게 한다. 우선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은 한국 교단이나 주파송 교회의 통제 아래 있다. 그리고 조국 교회에서 무의식적으로 배운 개교회주의 성향 때문에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은 선교 현지에서 어느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 결국 이들 교회는 독립 교회가 된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며 이율배반적이다.
파송 전 한국 선교사들은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사역을 한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해도 교단에 소속하므로 독립 교회를 절대로 세울 수 없다. 독립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독립 교회의 목회자는 다른 목회자들과 협력 할 줄 모르고 자신이 세운 교회에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으며 주인처럼 목회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목회자의 경건 삶에 유익하지 못하다. 이런 목회는 지체 이론이나 하나님 나라 이론에서도 맞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개인은 너무나 귀한 존재로 존중 받지만 그 만큼 다른 지체들도 존중하면서 몸이나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로 기능이나 역할이 달라도 협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아는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선 현지 교단과 단절된 가운데 독립 교회를 세워 목회한다.(사진: 기독교 전래 천년 이상을 자랑하는 러시아 정교회의 사원)
선교사들이 특정 선교 단체에 속하여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선교 단체는 대체로 목회를 모른다.  그러므로 선교 단체가 목회 면에서 소속 선교사를 구체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선교사는 물론 선교사가 세운 교회들은 현지인 교단에 속하여야 한다. 함께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동일한 주님에 의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 비로소 선교사 목회자들은 현지인 목회자들 다운데 활동하므로 자동적으로 견제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윤리적 그리고 목회적 탈선의 위험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선교사 자신을 위해서도 좋다. 우선 믿을만한 교인들이 있어 교회 행정 조직을 편성할 수 있고 현지인 교인들이 선교사 앞에서 일한다. 이 덕분에 선교사는 자신의 모든 힘을 본질적인 목회에 집중할 수 있다. 말씀을 좀 더 연구할 수 있고 좀 더 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그리고 심방을 통해 성도간의 교제가 원활해진다. 이를 통해 성도들이 감동을 받는다면 교인들의 변화가 서서히 나타나며 선교사를 존경하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를 도울 인력이나 조직이 없다면 선교사는 목회 이외 일에 너무나 많이 힘을 쏟게 되어 말씀 연구와 선포에 게으르게 된다면 결국 현지인 교인들의 존경을 잃는다. 그런 교회는 말씀 이외 방법으로 교회 성장을 시도할 것이다.
정착 선교를 지향한다.
한국 선교사의 독립 교회식의 선교는 목회적인 문제를 또한 야기시킨다. 선교사로 하여금 한 교회에 영원히 정착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에서 보고 배운 목회 자세가 그대로 선교지에서 재현된다. 그렇지만 선교사는 교회를 개척하고 안정되면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교회를 또 개척하여야 하는 목회자여야 한다. 그러나 독립 교회식의 선교는 이를 방해한다.  한국 선교사 이외 다른 목회자가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와 목회 영역을 넓히기 위해 많은 부분에 투자하게 된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이것은 선교사로 하여금 그 교회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 놓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엄청나게 불어난 재산이 선교사 자신을 타락시킬 수 있다.  우선 그 관리에 불필요한 관심과 시간 그리고 정력이 낭비된다.  그리고 향후 갑자기 선교사가 철수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교회 재산 처리 문제로 선교사 자신은 물론 선교사와 관련된 교인들 사이 유혹 거리가 생기며 교회를 분열시키거나 폐쇄시킬 수 있다. (사진: 현지 침례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침례식에 참여한 장 창수 선교사)     민족주의가 강한 러시아에서 정착 선교는 교회 성장면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선교사가 정착 선교를 지향하는 한 현지인 목회자 양성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착식 독립 교회 목회는 선교사의 독단적인 목회를 가능하게 하며 자신이 죽을 때가지 사역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현지인 지도자의 양성이나 배출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현지인 지도자 양육은 거의 불가능하다. 설사 선교사가 양육에 힘쓰려 해도 신앙 삶과 교회 삶을 산 성숙한 신앙인을 선발하기가 쉽지 않다. 선교사가 세운 교회의 년조가 짧고 현지에 내린 뿌리가 약하므로 그런 인물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선교사 가운데 신학교를 운영하는 경우 신학생 모집 자체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수업료를 받기보다 월급을 주어가며 사람을 모집하여 신학 공부를 시킨다. 이것도 쉽지 않아 남성도가 아닌 중년 여성 교인들이 신학교를 채울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현지 교회에서 여자의 목회에 대한 관점은 아주 부정적이다. 설사 남자 교인들이 수업을 받는다 해도 이들에게는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명보다 경제적인 동기가 앞선다. 이런 학생들을 통해 교회 개척은 거의 불가능하다.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 개척을 생각할 것이다.
선교사는 교회 성장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지 현지인들을 교회로 초청하여야 한다.  이 방법은 물질의 무상 공여이다.  물론 개방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러시아인들은 할 수 없이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이들 민족 자존심은 속으로 상했다. 예전 조그맣고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의 도움을 받는 러시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 출석 동기가 비복음적이다. 그러므로 물질적인 도움이 끊어진다면 러시아인들은 상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교회 출석을 멈춘다. 초기와 달리 러시아 선교사 부진한 것은 이런데 원인이 있다.
러시아는 자신을 두 번이나 유럽과 미국에 버금가는 나라로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비록 공산화의 경험은 있어도 전반적인 문화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의 민족 자존심은 무척 강하다. 이들은 동양인을 대할 때 서구인 못지않은 자존심을 보인다. 이 때문에 러시아인들 앞에서 교회 지도자로 사역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다. 작은 황인종 목회자의 어눌한 노어와 그 표현 그리고 이들 앞에서 지도자로 처신하는 것 자체가 이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러시아 선교는 이런 어려움을 수반한다. 이 때문에 독립식 정착 선교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선교학이 가르치듯 현지 지도자를 양육하여 맡기는 선교를 해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진 선교사는 독립 교회나 정착 선교를 하지 않으며 현지 교단과 협력하여 사람을 구해 양육하고 지도한다. 그의 주관심은 현지인 지도자 양육 자체에 있음으로 지나치게 많은 물질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다. 스스로 독립하는 현지인 목회자를 기르기 위함이다. 그렇게 현지인 지도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해 줄 때 선교사는 현지 교회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어수룩한 자세로 러시아 선교에 임한다면 곤난하다.  더구나 그들의 정서와 민족 자존심을 무시한 선교 전략인 독립 교회식의 정착 선교는 당연히 실패로 귀결된다.  요즘 한국 선교사의 러시아 선교가 벽에 부딪힌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고려인 편중 목회를 할 수 있다.
러시아 선교 초기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제일 처음 반긴 사람들은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들이었다. 그 동기는 단순히 한 핏줄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많은 고려인들이 출석했다. 이들 고려인들은 자부심을 가졌다. 항상 러시아인들에게 민족적인 차별을 받으며 산 그들의 눈에 한국인 선교사들이 러시아인들 중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기에 대리 만족감을 찾을 수 있었다.
      고려인을 중심한 러시아 선교가 활발해지자 이들 고려인들을 거점으로 한 러시아 선교 전략이 거론되었다.  이들 고려인들은 한국인으로 러시아에서 출생했고 자라 언어와 문화에 별 문제가 없다.   한국 선교사가 이들과 협력한다면 러시아 선교를 보다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한국교회는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 선교사와 고려인들 사이 문화와 정서상의 차이가 점점 노출되었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피가 같은 한국인이라도 러시아인임을 점점 더 자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초기와 달리 서로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았다.   한국 사업가들과 고려인 사이에서도 이런 유사한 말들이 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같은 동포이기에 정적으로 서로를 무조건 도와주어야 한다는 관계가 이젠 동등한 파트너로서 서로 돕고 도와주는 계약적인 파트너 관계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고려인 통역자들은 보수를 더 주겠다는 다른 선교사의 제안을 받으면 하루 아침에 선교사와 교회를 떠났다.   이들 고려인들도 처음부터 복음의 순수한 동기보다는 동포애에 바탕 하여 한국인 선교사의 교회 출석했기 때문이다.  이 동포애가 점점 사라지자 경제적인 동기가 노출되며 서로를 불신하게 되고 그 결과 한국 선교사들끼리도 불신하게 되었다.
     고려인 중심으로 한 선교의 단점이 있다.   목회자가 한국인이기에 고려인들은 교회 안에서 러시아인들 앞에서 불필요할 정도로 거만해진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고려인들이 대부분인 교회에서 러시아인 교인들은 소극적으로 활동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소수 민족인 고려인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인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러나 반대로 러시아 교인들은 말없이 교회 생활을 하지만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낀다.  우월감에 바탕한 민족 자존심이 강한 러시아인들이 볼 때 교회에서 고려인들이 자신들보다 우위인 것처럼 보인다.   두 민족 사이 이런 감정들이 한국인 선교사가 세운 교회의 부흥과 성장에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상기의 사실을 고려한다면 고려인들을 거점으로 한 러시아 선교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략적인 접근이다.  나중 선교사 대신 고려인 목회자가 후임자로 나타난다면 그 교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는 분명하다.  복음보다 민족 색깔이 강한 교회일 것이다.   결국 고려인을 통한 러시아 선교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고려인과 러시아인 사이 선교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가?  두 민족사이 감정적인 골을 감안하여 한 교회에서 인종별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 자기 인종을 위해 헌신하도록 해야 한다.   인종별로 목회자가 양육되고 배출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 때 교회 성장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나 사업을 위해 주재하는 회사원들과 사업가들은 한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출석한다. 이렇게 되면 교회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어느 인종을 중심으로 선교해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문제가 나온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선교지에서 선교사는 한국인을 위한 목회를 할 수 있다. 정착식 독립교회 형태로 사역하는 선교사에게 더욱 이런 가능성은 커진다. 그러나 현지인을 중심한 교회 사역을 하면서 그 외 시간 별도로 한국인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면 두 인종으로 나누어진 교회는 부흥할 수 있다. 인종을 고려한 선교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람직한 러시아 선교 방향
    현재 러시아에 주재하는 한국 선교사의 문제는 비자 문제이다.  현지 교단에 등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비자는 종교 비자로 그 기간은 3개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현지 교단에 속한다면 현지 교단의 신학원이나 성경 학교 강사로 초빙 받을 수 있다.(사진: 러시아 침례교단 총회장 까나발취크 목사와 노회장 에두아르드목사와 함께 조력자 알료샤의 목사 안수례를 하는 장 창수선교사)
    러시아에서 선교사들은 다급한 상황으로 갑자기 철수될 수 있다.  이 때 독립 교회식의 장착 선교를 하는 한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둘로 나누어 예상할 수 있다.      만약 교회 재산이 현지인 중 신뢰할 만한 교인의 이름으로 등록되었다면 그에게 모든 교회 재산이 맡겨진다.  선교사 철수 이후 그가 교회의 목회자로 일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교회 모든 재산은 사유화된다.  만약 선교사 이름으로 교회 부동산이 등록되었어도 결과는 마찬 가지다.  선교사가 선교 현장으로 되돌아올 수 없다면 모든 교회 재산은 결국 정부로 귀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상황을 중앙 아시아에서 목격했다.
   러시아 선교 현지의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선교사는 비상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은 교회가 항구적으로 남아 현지인들을 위한 구원의 방주로 남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현지 교단에 속하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 현지 교단의 목회자들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개입되도록 사전 조치되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선교사가 철수할 경우 교인들이 현지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국 선교사는 모스크바에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공의회를 말하며 그곳에 소속한다면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교회 이름만 등록되었지 현실적으로 공의회는 등록된 교회를 감독하거나 관리하지 못한다.  이름만 등록되었고 교회 모든 재산은 개인 선교사 이름이나 교인 이름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지 교단처럼 그 뿌리가 단단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이 갑자기 철수한다면 이 공의회에 속한 현지인 목회자들 사이 교회 재산으로 분열될 소지는 다분하다.  이런 사건은 이미 선교 현장에서 목격된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공의회가 법적으로 등록되었다 해도 여전히 유명무실하다.  러시아는 대륙과 같은 나라인데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 공의회가 그 넓은 지역에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현실적으로 감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한국 선교사가 떠난 교회를 현지인 목회자들이 자의로 처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는다.   이 때문에 현지 교단 중 뿌리가 있고 오랜 교단에 교회를 등록시키고 선교사 자신도 그 교단의 감독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 선교사들이 그 동안 땀으로 뿌린 수고의 모든 열매들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선교사 자신이 아니라 교회의 장래를 위해 현지 교단과 협력하는 선교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육신 원리가 말하듯이 결국 교회를 위해 선교사가 기쁘게 자신을 희생할 때 선교사가 세운 교회는 주님 재림까지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할 것이다.  
    현지 교단과의 협력 선교
    현지 교단과 협력하면 현지인 교단에서 신뢰하는 지도자감을 보다 쉽게 찾을 수 있고 그를 양육하여 목회자로 세운다면 선교사가 갑자기 철수해도 교회는 안전하다.   어느 때라도 선교사는 교회를 떠날 수 있다.  안식년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현지 교단과 협력하면 교회 개척도 용이하다.  그 교단이나 현지 교회는 어느 지역에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순차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  많은 교인들이 살지만 교회가 개척되지 못한 지역들이 있기 때문이다.(사진: 안식년을 떠나기 전 송별 예배 중 회중과 함께 찬송하는 장선교사)
    그렇게 도움을 받아 교회가 개척되면 소수라도 믿을 수 있는 교인들이라 그들로 교회 조직을 세운다면 선교사는 일일이 교회를 위해 일할 필요 없다.  제직회나 공동 의회에서 의논된 모든 일들은 현지인 조력자나 제직들을 통해 쉽게 수행된다.  조력자나 현지 교인들은 현지를 잘 알기에 어떤 일이든지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선교사는 다만 이들을 감독내지 지도만 하면 된다.
    이들 현지인들은 쉽게 이웃을 초청하여 교회로 인도할 수 있다.  그러나 현지인의 도움이 없이 선교사 자신이 직접 전도하면 러시아인들은 사이비 종교 광신도로 취급하며 경계한다. 결국 선교사 자신이 전도를 방해한다.  이 대신 선교사는 전도 계획을 세워 공동의회의 결의로 추진한다면 이런 불필요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현지 교단과 협력하지 않으면 선교사가 하나부터 열까지 일해야 한다.  현지도 모르면서 교회에 필요한 모든 기자재들을 직접 구입한다.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낭비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이 너무 힘들어 현지인을 고용하여 일한다.  그러나 현지인은 복음 동기가 아니라 물질 동기로 일하기에 그리고 일하면서 선교사에게 충분한 재정이 있음을 알고 불필요한 유혹을 받는다.  이 때문에 선교사는 불필요한 문제로 인해 자주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2‐3년 일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현지인들을 불신하게 되고 이 불신감은 목회에 지장을 주며 시간이 지나면서 선교사 자신도 영적으로도 번‐아웃 된다.  이렇게 현지 교단과 협력하는 것은 선교학적으로도 그리고 선교사 자신을 위해서도 너무나 중요하다.  
    현지 교회 지도자 양육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부흥 성장하며 교인들 중 제직이나 장래 교회 지도자 양육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선교사들의 제안으로 한국으로 현지인 신자들을 초청하여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이 다년간 진행되고 있다.  이젠 이것도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은 대체로 현지 교단과 협력 관계가 없는 독립 교회들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례 교인들 중 고려인들이 많다.  그리고 교회 연혁이 짧음으로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므로 고려인들 중 젊은 청년들이 한국으로 초청되어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고려인들이 무의식적이건 의식적이건 이 교육 기간을 한국 방문 기회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한국 방문 기회를 얻기 위해 일년간 고려인들이 불필요하게 선교사에게 잘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방문 기회를 얻지 못하면 이 교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고 난 이후에도 교회 출석을 잘 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렇게 방문 목적이 변질되어 있어 한국에서 교육 후 현지에 와 교회에 유익한 일군으로 봉사한다는 보장은 없다.  복음 동기 이외 것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 헌신된 장래 교회 지도자감들이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주된 이유는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이 정착 선교식의 독립 교회를 지향함으로 현지인 지도자감을 찾는 일은 애초부터 힘들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목회 후임자 양성보다 제직 양성 차원에서 선발하고 보낸다. 이런 제직 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초청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낭비이다.        수강자들이나 강의자들의 수준이 서로 맞지 않는 가운데 추진된 교육도 문제다.  교육에 초청 받아 참석한 젊은이들은 높은 수준의 신학 강의를 소화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이 목회자로 일하지 않는 한 배운 지식은 그대로 사장된다.  아니면 이들이 오히려 교회 분란의 원인을 제공할 수 있다.  목회 현장을 모르고 배운 단편적인 신학 지식으로 선교사의 목회와 신학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신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목회자를 위한 신학 교육을 받는다.  본교회로 되돌아가 교회 지도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서로 격이 맞지 않는 초청 교육을 한 까닭이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사진: 송년 예배 사회자인 조력자 알료샤, 장선교사 안식년중 담임 목회자로 사역함)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하겠다면 현지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한다는 교육의 본래 목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닌 현지인 교단 소속 목회자들을 초청하여야 한다.  이들이 러시아 복음 운동의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 내용도 수정해야 한다.  신학적인 커리큘럼보다 현실적으로 목회나 교육 그리고 전도 프로그램에 필요한 커리큘럼이어야 한다.  현지인 목회자들은 이제 경우 10년 동안 자유롭게 목회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분야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매우 미천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목회자로서 일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한국 목회자가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방식이 현지에 맞지 않을 수 있음을 감안하고 겸허히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신학 교육을 계속 고집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러시아 현지 교단은 교리적으로 반알미니안 즉 웨슬리안에 속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칼빈주의자들인 강사의 강의는 이들에게 교리적인 혼란을 준다.   칼빈주의의 일방적인 주장보다는 소개와 안내를 통해 서로 비교하며 이들이 더욱 깊게 성경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녁 집회도 한국식 즉 열정적인 부흥회식 집회보다 말씀을 잘 풀어 깨닫게 하여 감동을 주는 집회여야 한다.  무조건 '아멘!'을 강요하는 식의 일방적인 설교는 이들에게 전혀 납득되지 않는다.
    미국 교회의 현지 지도자 교육 방식을 소개한다.  이들은 목회에 성공한 목회자 한 사람을 보내 2‐3일간 아침부터 오후까지 실제적으로 도움되는 강의를 한다.  신학적인 강의는 피한다.  한 곳에 2‐3백명을 모아 합숙시키며 이들 현지인 목회자들을 가르친다.  저녁 시간은 현지인 교회 지도자들에게 시간을 주어 그들 자체 프로그램을 하도록 한다.  이들이 한 곳에 함께 모이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려면 거의 5만불 정도의 예산이 소요된다.     그러나 매년 지역을 달리하며 인원수를 줄인다면 1‐2백명 정도로 한다면 2‐3만불의 재정으로 충분히 현지인 목회자들을 가르칠 수 있다.  소수 정예의 강사진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하면 한국으로 초청하는데 따른 불필요한 잡음이 선교 현장에 생길 수 없다.
    수정된 러사아 선교 전략
    위에서 고찰한 내용을 중심으로 본다면 분명히 기존의 러시아 선교 전략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이 이미 10년 넘게 러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 나름의 교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도 곤난하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른 선교지와 달라 안정적이지 못하다.  러시아의 정치는 항상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예상 외로 동양의 독단적인 정치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 모든 사실들은 선교사들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비상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계획은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선교사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속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비상 계획은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들이 어떤 방법이든지 현지 믿을만한 교단과의 교류와 협력을 요구한다.
    교회가 계속 존속할 수만 있다면 현지 교단의 장단점에 대해 너무 민감할 필요 없다.  한국 교회나 교단도 완전하다고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또한 교회를 돌본다는 믿음으로 현지 교단과 과감한 협력을 해야 한다.
    새로 파송될 선교사들은 2‐3년 동안 언어를 배우고 현지 적응에 힘쓰며 이와 동시에 현지 교단의 목사 회원과 지교회의 세례 교인으로 등록하여 현지 교회의 예배 전통과 신앙 전통 그리고 교리를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들과 교제를 하면 많은 문제들을 쉽게 해결 받을 수 있다.  이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다면 2‐3년 뒤 교단과 지교회의 허락을 얻어 이들이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지역에 사는 교인들과 함께 쉽게 교회를 설립할 수 있다.   비자 문제도 쉽게 해결된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선교하며 3곳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한 바 있다.  현지 조직이 있음으로 필요한 사람이 있어 사역상 불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한편 이 글을 통해 본인의 사역을 자랑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데 마음이 꺼림칙하며 그리고 본인과 다른 방식으로 선교하는 선교사를 공박한다는 인상을 줄까 봐 노파심도 생긴다. (사진: 1차 사역 교회 안수집사 장립식에서 축하 설교하는 장선교사) 다만 러시아 선교를 재고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즉 하나님 나라를 이곳 러시아에 좀 더 아름답게 세우자는 의도에서 글을 썼다고 말하고 싶다.   감정적이기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며 읽어 주었으면 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러시아 선교 재고찰 이재섭 2011.05.15 2698
7 인터넷선교사님 소식 7 이재섭 2010.08.19 6236
6 선교사와 목회자 6 file 이재섭 2010.01.23 3837
5 선교의 핵심, 사람 27 이재섭 2009.10.15 3302
4 끝이 아닌 시작 1 file 이재섭 2009.10.08 3172
3 제1회 러시아 극동지역 선교대회 의미 크다 file 이재섭 2009.06.23 3172
2 블라디보스톡에 문화선교 꽃피운 부부 선교사 / 예수님이 하셨어요 이재섭 2008.06.18 3239
1 인도네시아 선교사님들 얼굴에 꽃이 피었습니다 이재섭 2008.06.08 3299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