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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연구의 역사와 지역 정체성 문제



시베리아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시베리아 연구의 역사와 지역 정체성 문제(18,19세기)

*본 논문은 2002년도 배재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수행된 것임 -->*1)



1)이 길 주**


1. 서 언


시베리아 지역이 지닌 대륙간의 교량 역할과 자원보고로서의 가치가 점증하며 시베리아는 러시아 중앙정부의 자원기지로서의 의미를 넘어 소연방 붕괴 후 이 지역의 지정학적 혹은 지경학적 가치가 재인식되고 있다. 또한 연방정부 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지역 개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특히 시베리아-극동 지역의 원유,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의 채굴과 파이프 라인의 건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석유-가스 공급을 위한 그물망의 건설 및 송전선의 구축 등을 계획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특수성을 활용하여 유럽과 아시아의 고리역할을 모색하고 있으며, 아시아 지역의 발전거점으로서 시베리아-극동 지역을 중점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간 이 분야에서 논의되거나 연구되고 있는 내용들은 러시아의 경제 성장이라는 당면 목표와 자국의 경제적 이해득실의 관점에서 시베리아가 가지고 있는 자원 개발이라는 경제성의 문제로만 집중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 분야가 가지는 중요성이 현재 매우 크다는 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겠으나, 향후 동북아시아의 협력체 구축과 시베리아에 대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대 명제에 부응하는 기초적이고 전문적인 시베리아 지역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간의 연구와 개발의 역사에 대한 검토와 평가가 기초되어 진행되어야 한다.

지난 20세기이래, 특히 소련의 붕괴 후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적 상징인 대지, 러시아 민중에 대한 전통적 신임은 유럽 러시아지역에서는 그 토대가 흔들리고 있다. 대신 우랄 이동의 시베리아에서 대지, 처녀림의 상징성이 살아나고, 개발논리에 의한 논쟁과 갈등관계가 심화되며 오히려 시베리아 지역주의를 둘러싼 지적 논쟁이 심화되고 있는 듯하다. 이는 특히 90년대 개방이후 러시아 저널리즘 및 정치담론들과 함께 문학작품 속에서 구현되어 왔다. 발렌찐 라스뿌찐이 그 예이며 그의 발언은 러시아 문학계뿐만 아니라 사회일반에서도 비중을 더해가고 있다.

이미 시베리아에 대한 인식은 러시아 역사 속에서 일방적 서구화에 따른 러시아의 정체성 문제가 부각될 때마다 아시아와의 접점 지역으로 유럽문화의 대안을 찾는 마당으로 제기되어 왔다. 시베리아는 자연 자원과 함께 광활한 공간이 주는 심리적 풍요로움에 의해 유형지, 혹한, 미개함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희석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로 각인된 이 땅에 대한 인식이 아직 러시아 문화 및 정치담론 속에서 그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지역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더구나 중앙통제하의 체제의 특질에 의하여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역정체성과 관련된 담론은 분리독립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알레르기 반응에 의하여 기피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시베리아에 대한 인식과 관점은 제국주의적 성격의 개발논리에 의거한 편향적 자세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한편 러시아 문학과 인류학 등 인문학적 측면에서는 개발과 보호 또는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에 의한 상반된 입장이 양분되어 러시아 내외에서 상호작용과 논란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다년 간 시베리아 유형의 고초를 겪은 17세기의 사제 아바쿰이나 19세기의 작가 도스또옙스끼에게 있어 시베리아는 혹독한 유형지였지만, 그들이 중앙 러시아로 복귀할 즈음에는 자연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이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 유토피아로 미화되고 있다.

19세기 초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들을 포함하는 제까브리스트들에게도 시베리아는 철저히 문명에서 소외된 고통과 어둠의 지옥과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점차 중앙러시아의 도시의 압제와 농노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시베리아의 자유와 환희가 살아 숨쉬는 이 처녀지의 상징성을 통해 유토피아 이미지로 탈바꿈시켜 그려내고 있다. 짜르 체제에 반기를 들고 지하 혁명 조직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한 이유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장기유형을 체험한 체르느이셉스키도 시베리아는 농노제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 러시아로부터 가장 진보적이고 발전된 지역민들의 유입에 의하여 유럽러시아보다 지적수준이 더 높은 것으로 평하였다.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관점과 이미지는 17세기의 아바쿰 사제이래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이중적 구도로 나타났지만, 정책 측면에서는 오로지 중앙 정부에 의한 미개척 식민화의 대상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식민화 시대의 유럽과 러시아의 시베리아에 대한 관점에 있어 공통적 현상이기도 하였다. 러시아에서의 시베리아에 대한 인식의 틀은 바다를 통해 제국의 확장을 꿈꾸며 탐험과 선교를 빙자해 세계 각지를 점령한 영국과 유럽 각국의 선구자들이 남긴 단편적 인상과 보고문과 무관치 않다. 더구나 뾰뜨르 대제에 의한 본격적인 시베리아 탐사와 연구는 사실 뮐러와 그멜린 등 유럽 출신 학자들의 주도로 시작되고, 그들의 탐사와 연구보고는 많은 부분이 독일 등 유럽에서 먼저 출간되기도 하였다.




2. 유럽인들의 관심과 연구


16세기에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하며 아시아로 향한 해로개척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중국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북빙양을 거슬러 오비강을 따라 중국내륙으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1553년 리차드 챈슬러 함장의 지휘 하에, 모스크바의 이반4세와의 영국과의 무역 협정을 위한 협조를 얻어 이 계획이 시도되다가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후 스테판 뵤로, 아르뚜르 페트등 영국의 탐험가들이 이 길을 재탐색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폴란드 역사학자이며 크라콥스키 대학 교수와 총장을 역임한 마트베이 메홉스끼(1457-1523)는 실제로 러시아에는 한번도 가보지도 못하였으나 폴란드를 방문한 러시아인들을 통해 자료와 지식을 습득하여 1517년 “두 싸르마찌예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러시아의 동쪽 지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페름, 바쉬끼리야, 체레미씨야, 유그라, 까렐라 등지의 지역을 거론하며 이 지역 지역민을 스끼피 족으로 명명하고 이들이 각기 고유한 언어와 풍습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메홉스끼는 역시 그들이 경작을 하지 않고 빵과 금전의 개념도 모르며 모직을 이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동물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는 “짐승 같은” 생활을 하는 원시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모스크바 공국 이래 러시아에 모피로 조공을 바치며 깊은 숲 속에 사는 원시적 생활상만을 전하고 있다.1)

신성로마제국의 대사로 러시아를 1516, 1526년 두 번에 걸쳐 다녀간 시기즈문드 게르베르쉬쩨인은 1549년 「모스크바에서의 일들에 관한 기록」이란 제목의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의 시베리아를 여행한 러시아인들과의 대화를 소재로 시베리아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그는 오비와 이르뜨쉬강과 그 지역을 소개하며 이 지역에 수많은 동물과 그 모피를 획득할수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중국으로 연결되는 오비강 유역에는 검은 인간들이 있으며 그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하며 귀한 보석들과 같은 다양한 물건들을 가져오기도 하며 11월 말에는 통상 죽었다가 4월24일경에 봄에 다시 되살아난다는 엽기적인 정보를 전하기도 하였다. 오비강의 상류로 추정되는 “꼬씨마”강 건너에는 털로 뒤집어쓴, 때로는 개의 머리를 한 원시인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이는 모두 마치 우화나 신화적 테마가 그들이 모르던 시베리아 원주민에 대한 이미지와 혼합된 듯 한 것이다.2)

1613년부터 네덜란드인 외교관이었던 이삭 마싸는 두개의 논문을 통해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로의 길과 시베리아의 강과 도시들을 지리학적 측면에서 보고하고 시베리아에 관한 지도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퉁구스와 싸모예드 종족의 분포위치를 그리고 있으며 동방으로 향하는 북방 해양로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3)

북빙양을 따라 해상탐사로 시작된 시베리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최초의 관심과 기록은 이미 16세기에 시작되어 러시아를 앞지르고 있지만, 지속적이고 체계적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시선이 이후 아메리카를 비롯한 더 좋은 식민지로 옮겨 간 결과이며 러시아 제국의 성장에 따른 귀결이었다. 16세기 유럽인들에게 시베리아는 아직 어둠의 땅이며 무지와 원시의 땅으로 비춰졌다.

영국에서의 초기 시베리아에 대한 관심은 여행기, 문화인류학 탐사 등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16세기-17세기에 영국에서는 시베리아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와 관찰기, 연구자료가 혼재되어 있었다. 추위와 영구동토, 적막하고 환상속의 인간과 동물이 사는 곳, 전설 속의 “흰 도시”와 반인반수의 “바란짜”의 땅 등의 환상적 이미지에서 사실주의적이고 역사-인류학적, 지리학적 저작들로 점차 현실속의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J. 플레쳐와 S. 콜린스의 페르먁과 싸모예드 종족에 대한, 그리고 U. 퍼스글로우의 퉁구스 종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가 있다. 그리고 몇몇 지하자원과 삼림, 모피 자원, 그리고 도시에 관한 보고서와 시베리아 유형수와 유형지에 대한 문건이 있다.4)

18세기 이래 영국에서 시베리아에 대한 이미지는 점차 긍정적, 우호적 이미지로 바뀌기도 하였다. 그것은 시베리아의 발전가능성과 “축복받은 원시인-즉 문명의 오염을 받지 않은 순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 그러나 일면에선 과장된 이미지로. 즉 풍요로운 자연자원에 의한 폭발적 발전, 번영의 땅으로 묘사되고, 특히 상업적 가치에 의한 식민화의 대상지 측면에서 그려지기도 하였다.(조지 파킨슨의 페름과 또볼스크 묘사, 브리타니카에서의 19세기중엽 이르꾸츠끄 묘사-문화중심지로 표현) 그리고 원주민에 대해서는 아직 문명의 오염이 닿지 않은, 모랄과 자연성에 있어 다른 민족들 보다 우수함을 간직한 민족으로 까지 인식하고 있다.(J. 페리. J. 벨)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영국에서는 다시 이중적 관점이 전개된다. 러시아 내에서 가장 끔찍한 땅으로서의 이미지로 시베리아를 평한 G. 바리는 “시베리아란 말은 흔히 끝없이 펼쳐진, 녹지 않는 광야를 연상시키며 그곳 주민들은 오직 정치범이며... 곰들과 사투를 벌이며 살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러시아 정부의 식민정치와 지방통치의 실험장 노릇만 지속되어 서구적 민주주의 개념은 이식되지 못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비극적 결과만을 안겨주고 있다고 평하였다. 낙관론과 긍정적 측면에 대한 기술은 거의 사라지고 점증하는 문제들만 부각되는 추세였다. 한편 당시 런던에는 무정부주의자 뾰뜨르 알렉세이비치 끄로뽀뜨낀와 스쩨쁘냑-끄랍친스키 등 증가한 러시아 이민자들에 의해 그들 이 쓴 영문 문건들이 대거 확산되며 러시아와 시베리아지역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질적, 양적으로 증대되었다.5)

그러나 한편 낙관론적 관점도 나왔다. 그것은 특히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작가와 시인 등 문학인들의 인문주의적 발상에 연유된 듯 문학작품에서 나왔다. 데포우의 「로빈손 크루소」의 제 2 부에 해당되는 “로빈손 크루소의 삶과 놀라운 사건들”에는 로빈손 크루소가 러시아를 여행하며, 아무르에서 아르한겔스크까지 1년 반 동안의 체험기록으로, 데포의 시베리아에 대한 인상이 있다. 그것은 황무지, 추위, 동방의 신비, 이국적 성격 등으로 로빈손에게 있어 시베리아 유형은 그의 영혼의 부활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6)

시베리아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식민지 개척을 위한 패턴의 지역탐사와 인상으로부터 시작되어 개별 관점과 테마에 따른 상이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를 거쳐 20세기 들어 러시아의 영토인 이 지역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점차 종합화, 객관화하여 식민 주체국인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보완하는 성향을 갖게 되고 주제별 각론화 된 연구 성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특히 시베리아의 긍정적 정체성과 피지배 원주민에 관한 관심과 연구는 제국 러시아 내에서보다 일면 더 적극적일 수도 있었다.

그 예로 1914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Aboriginal Siberia-A study in social anthropology」는 시베리아 원주민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 연구서라 할 수 있다. 폴란드출신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민족학자인 저자 차플리카(M. A. Czaplicka)는 시베리아의 지리, 사회, 종교, 민족과 그들의 병리에 이르는 포괄적이고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 책을 통하여 이전의 단편적 정보와 인상과는 다른 종합적인 관점에서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19세기의 러시아, 독일, 영국의 반자로프, 보고라스, 요헬슨, 끄라셰닌니꼬프, 미하일롭스끼 등의 업적을 폭넓게 섭렵하여 종합하고 있으며, 특히 샤마니즘 연구의 초기업적으로 가장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차플리카는 서문에서 당대까지 시베리아 원주민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가 모두 단편적이었음을 밝히며 다만 제섭 탐험대(Jesup Expedition)의 조사 연구 결과가 심오하고 체계적이나 이도 동북지역에 치중되어 있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제섭이 제기한 동북아시아 원주민과 서북아메리카 인디안의 관련성과 신,고 시베리아 종족의 상호관계, 그리고 지난 10년간의 종족 이동 문제를 향후 연구과제로 지적하였다. 특히 시베리아 원주민에 대한 체계적이며 가장 호의적인 연구로 1891년 출간된 야드린쩨프의 “시베리아 원주민, 생활상과 현 상황”을 평가하며 당대 러시아 내에서도 시베리아 연구서가 극히 드물었음을 러시아 학자들도 인정한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7)





3. 러시아의 시베리아 탐사와 연구의 역사


로모노소프는 “러시아의 힘은 시베리아로부터 급 신장할 것이다”라고 공언한 바가 있다. 이로써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본격적인 관심은 정치 경제적 힘의 근원으로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팽창의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후 19, 20세기를 통해 러시아, 소련의 정책 결정자와 엘리뜨들이 실천적으로 보여준 시베리아에 대한 식민화와 개발논리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는 이미 17세기 이전에 모피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알려지고 나서 이 곳의 경관, 기후, 원주민 등에 대한 자료가 탐험대의 수기나 보고서로, 또는 조관형식으로, 그리고 이야기 등 여러 형식으로 수집되어 갔다. 11세기 이래 노브고로드인들을 비롯해서 러시아인들이 우랄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시베리아를 방문했지만 16세기 까지도 시베리아에 관한 정보는 “우랄 너머에는 괴상한 사람들이 산다- 어떤 자들은 ‘머리가 없고’ 그리고 ‘입은 두 어깨 사이에 있고’, 또 다른 자들은 ‘여름 내내 물 속에서 살고’, 또 다른 자들은 ‘땅 속을 걸어 다니고’ 있다” 는 등의 환상적이고 맹랑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1582년 까자크 대장 예르마크에 의한 몽골 시베리아 칸국의 점령이후 러시아의 군인, 사냥꾼, 농민, 상인, 탐험가 등은 시베리아의 강과 타이가를 따라 (주로 모피를 구하기 위해) 대거 시베리아 각지를 여행하고 그 결과 단편적인 인상과 보고문들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접근 통로, 모피 산지, 유용광물 산지, 농업 경작지 조성 가능성, 원주민의 주업과 인구수에 대한 조사보고가 이루어지고 이어 오스뜨로그의 위치와 정황에 대한 지도가 요청되어 그려지기도 하였다. 그 결과 흔히 작성자의 취향에 따라 정보는 작위적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양의 지리, 인종, 경제, 역사 등의 조사보고 자료가 모스크바로 모였다.8)

특히 1667년에는 또볼스크 지사의 지시로 최초의 시베리아 지도가 작성되고 이어 1701년에는 지금까지도 역사, 지리, 인류, 언어학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인, 또볼스크 소영주 쎄묜 울랴노비치 레메조프의 「지리도면Чертежная книга Сибирь」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까지는 실질적으로 시베리아에 대한 정확한 면적이나 지정학적 위치 또는 경계선이 불명확하였다.9)

18세기 초에 들어 시베리아의 거의 전 지역이 피상적인 러시아의 영토로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국경선을 획정하기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 시베리아 ,극동과 연해주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정보를 위한 탐사가 활발해 지며 연구 활동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시베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8세기 들어 짜르 정부의 제국주의 식민화 정책의 본격화에 맞물려 전개되었다. 뾰뜨르 1세의 지시에 의하여 학술탐사단의 파견으로 시작되고 지리학, 인종학, 역사학, 동식물학 분야별 연구가 진척되었다. 특히 그것은 독일 등 유럽의 학자와 전문가들의 참여로 국제적 성격까지 띠고 있었다.

뾰뜨르 1세는 역시 실천적 지도자로 시베리아에 대한 모든 정보를 확보할 가능성을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1716년부터 과학탐사대의 파견을 준비시켰다. 그 결과 1719년 시작된 예브레이노프와 루쥔에 의한 지리탐사는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탐사였으나 캄차트카와 16개 꾸릴열도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그쳤다. 이 해에 뾰드르 1세는 자연학자 다닐 고트리프 메쎄르쉬미트를 지리와 자연자원을 탐사 연구하도록 파송하고 이후 그는 7년간 시베리아 전 지역을 탐사한 방대한 결과를 뻬쩨르부르그 아카데미에 보고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서시베리아 탐사에 동행한 스웨덴 장교로 러시아에 포로로 잡혀있던 스트랄렌베르그는 이후 스톡홀름에 돌아가 1730년 “유럽과 아시아의 북동지역”이란 문건을 출간하여 이후 시베리아 역사와 민속학 연구에 기여하기도 하였다.10)

1724년 12월 뷔투스 베링을 단장으로 측지학자, 항해사, 군인 등 대규모의 인원으로 구성된 제1차 캄차카 탐사단이 구성되어, 다음 해 1월 뻬쩨르부르그를 출발하여 5년여의 기간 동안 북태평양 탐사를 하였다. 베링은 덴마크 출신으로 러시아 정부에 근무하다 뾰드르 1세에 의하여 발탁되어 탐사단을 이끌고 오호츠끄를 출항하여 깜차트까 반도를 우회, 아시아대륙 북쪽 끝에 도달하였다. 탐험대는 이 지점에서 해안선이 서쪽으로 뻗어 있다는 것과 아시아와 북미 사이에 육지의 접속부분이 없다는 것과, 다만 나중에 ‘베링해협’으로 불리어진 해협이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냈다.11)

1725년 제정러시아 예술 과학아카데미 설립이후 아카데미 주도로 우랄이동 지역에 대한 탐험과 연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후 시베리아에 대한 적극적인 식민지 개발의 역사가 전개되고 학술적 탐험이 병행되었다. 1733년에 시작되어 1743년 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진행된 제 2 차 캄차카 탐사단의 활동은 “대북방탐험대”(Великая Северная экспедиция)로 불리어지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학술탐험이었다. 이 탐험대는 하나의 육상 탐험단과 여섯 분대로 나뉜 해양 탐험단으로 이루어졌다. 육상탐험단의 임무는 첫째로 러시아화 된 시베리아의 실지연구와 함께 바이칼에서 동쪽으로 오호츠크까지로 나아가는 최단거리의 육로를 개척하는 것이었으며 해상탐험단의 임무는 깜차트까 연안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과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해협과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해로를 개척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또한 유럽으로부터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북방해로의 가능성을 타진하기위한 목적이 전제되었다.12)

이 탐험대의 성격을 규정짖는 특징은 “학술(아카데미)”탐험이란 명칭 하에 유럽의 학자들-독일인 교수 뮐러(G. F. Műller)와 그멜린(J. G. Gmellin)이 학술연구를 주 하였던 사실이다. 그것은 물론 서구화를 추진하던 뾰뜨르 1세의 방식이었으나 러시아와의 공조 하에 시베리아로의 진출을 도모하던 유럽의 숨은 야심이 깃들어 있었던 것으로 비추어 진다. 그것은 마치 현대의 우주개발에 러시아와 미국, 유럽이 공동 연구개발을 추진하는 모습을 닮아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인 델릴(J. N. Delisle)은 천문-측지를 담당하다 깜차트까에서 사망하여 그 뒤를 끄라셴닌니꼬프(С. П. Крашенинников)가 맡고, 또 독일인 피셔(J. E. Fisher)가 역사사를 담당하기도 하였다.13)

그들의 연구업적은 역사, 민족학, 지리, 기상, 천문 등 방대한 결과물을 이후 남기고, 특히 자연학자 그멜린의 시베리아의 광물, 동식물 군에 대한 수집과 연구는 획기적 보고로 남고, 뮐러의 시베리아 역사 연구는 오늘날까지 중요한 문헌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후 그멜린은 1740-60년간 무려 1178 종의 식물에 관한 관찰을 담은 “시베리아의 식물상”이란 제목의 연쇄 단행본과 10년간의 탐험일지-「시베리아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по Сибири」를 내고 유명해지고, 끄라셴닌니꼬프는 1755년 「깜차트까 지지Описание земли Камчатки」를 출판하여 반도의 자연, 역사, 문화, 주민의 생활상에 이르는 자료를 제공하고, 피셔(J. E. Fisher)의 깜차트까 역사조사 연구 성과 역시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이후 끄라셴닌니꼬프의 「깜차트까 지지」는 불어, 영어, 독일어, 화란어로 번역되어 유럽 각국에 소개되었고, 그멜린의 시베리아 식물에 관한 연구는 전세계 식물학계의 보고가 되었으며, 빨라스의 저술도 불어와 영어로 번역되고 세계적 평가를 받았다.14)

뮐러는 1750년 유명한 「시베리아 역사」의 제 1 권을 러시아어로 출간하고 이후 2, 3권을 독일어로 출간하여 독보적 업적을 남가고 시베리아 역사에 관한 잡지도 출간하기 시작하였다.15)

뮐러는 웨스트팔렌 출신 독일인으로 1725년 러시아로 이주하여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교수로 러시아 역사연구 분야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이후 러시아 국가의 기원에 관한 “노르만 설”의 창시자 중의 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1733년부터의 시베리아 탐사연구로 시베리아 전문 역사학자로 남게 되었다. 그는 시베리아의 역사, 인류학, 지리학에 관련된 다양한 논문과 독보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원주민의 구전 전설에부터 그들의 관습과 생활상을 보고하고, 고대 유물과 문자가 남은 고고학적 유물에 관한 묘사에서부터 시베리아 원주민의 언어를 정리한 사전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업적을 남기고 이후 러시아 역사학계의 “시베리아 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16)

뮐러와 함께 그멜린은 시베리아의 당대 사회상을 보여주는 보고를 통해 그 곳의 러시아인들과 원주민의 생활상까지 객관적으로 보여 주기도 하였다. 지나친 음주와 잔인성 등이 러시아인이나 원주민이나 공통적으로 문제였으며, 코를 잘리는 형벌이 보편적으로 자행되던 뾰뜨르 치하의 이 변방주민에 대한 정책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도 거침없이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멜린은 예르마크를 ‘강도’로 부르기까지 하여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까지 취했다.17)

“대북방탐험대”의 제 6 분대는 베링 자신이 이끌게 되고 그래서“제2의 깜차트까 탐험”으로 명명되고 있기도 하다. 이들은 북태평양을 집중 탐사하여 1739년 꾸릴열도를 거쳐 일본 호까이도 섬까지 진출하고, 이어 1741-1742년간에는 치리꼬프와 베링이 북아메리카 연안에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때 “성 뾰뜨르”호로 회항 중 풍랑을 만나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고 베링을 포함한 많은 인원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당대로서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러시아의 이 “대북방탐험”의 결과는 러시아를 비롯한 서방세계에 시베리아, 극동, 북태평양, 북아메리카에 이르는 지리적, 역사적, 인류학적, 경제적 지식과 정보를 알리는 대업임이 분명하다. 18세기 전반 러시아 내의 시베리아에 대한 한정된 지식이 경계를 넘어 태평양으로 확장된 것이며 탐험대의 위업은 러시아 역사에 수록되었고 이후 유라시아 제국 러시아의 영향력이 동아시아에 기반을 갖추게 된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없는 식민지 확장을 위한 서세동점의 일환이기도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1768-1779년간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한 호주 탐험이 이루어지고 호주대륙이 영국의 식민지로 공포되고, 1799-1802년간 A. 굼볼트와 E. 본플랑에 의한 남아메리카 탐험이 이루어 졌다.18)

18세기 후반에도 러시아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지속되고 “비밀 탐험”에 의한(군인들을 동원한) 알류샨 열도와 북미로의 해양탐사와 추꼬트까의 육로탐사가 이루어 졌다. 과학아카데미의 주도에 의한 지속적인 탐사연구도 진행되어, 1770년대에 빨라스(П. С. Паллас). 레뻬힌(И. И. Лепехин), 활크(И. П. Фальк), 게오르기(И. И. Георги)등의 활동으로 서시베리아 전역으로부터 알타이와 바이칼 지역에 대한 집중적 탐사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 지역의 광물 및 지하자원이 밝혀지고 지역민의 생활상과 문화와 역사가 연구되어 출간되기도 하였다. 1780-90년대에는 또볼스끄와 이르꾸츠끄등 동, 서시베리아의 자연, 경관, 기후, 인구 및 민족 분포, 도시 경관과 지역민들의 관습, 상거래와 산업 현황 등이 상세히 종합적으로 기술된 지지-지역학적 연구물들이 대거 출간되었다.19)

로모노소프의 연구업적은 시베리아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시베리아 북부지역의 영구동결현상을 연구하고 “북해에서의 빙산의 연원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을 통해 북빙양의 빙하 형성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기도하였다. 1770-73년간에는 빨라스가 알타이를 비롯한 서시베리아, 이어 동시베리아와 자바이칼을 탐사하고 지리와 자연, 그리고 시베리아 원주민의 생활상과 문화, 언어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레뻬힌은 1768-73년간 북유럽과 서시베리아를 탐사하고 4권의 수기로 남기고, 활크와 게오르기는 1769-74 우랄과 알타이 등지의 서시베리아와 바이칼 연안을 여행하고 특히 게오르기는 바이캍 호수의 동식물상과 이 지역의 자연과 광물자원에 대한 연구보고 결과를 독일어로(「Bemerkungen einer Reise im russischen Reiche in den Jahren 1772-74」) 내기도 하였다. 게오르기는 시베리아 원주민에 관한 중요한 연구성과를 통해 그들의 생활상과 문화, 사회관계에 대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20)

19세기는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실질적인 개발과 통치의 시대가 열리고 대신 탐사단에 의한 연구 활동은 소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19세기 전반 북태평양, 특히 깜차트카와 사할린에 대한 탐사가 지속되고, 1815-18년간에 꼬쩨부(O. Kotzebu)에 의한 태평양으로부터 대서양에 이르는 해로의 발견도 이루어졌다. 19세기는 이들 탐사와 함께, 지역 시베리아 지식인들에 의한 현지 지역연구가 시작되는 시기가 되며 오히려 이들에 의한 인종지지학적, 역사적 연구물들이 심도 깊은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1830-40년대에는 지질학적 발견이 확산되어 금과 석탄 등 매장자원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이어 19세기 후반에는 지역경제에 대한 인식과 함께 지역 정체성의 확립과 정치적 자율성을 확대하려는 지역주의적 연구와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21)

이같이 19세기까지 시베리아에 대한 식민화의 과정에서 지역연구는 시대적 특성을 따라 방법과 주안점이 변천되었다. 17세기는 레메조프에 의한 역사-지리적 연구가 돋보이며 , 18세기는 뻬쩨르부르그 정부 주도의 대규모 탐사단의 연구 활동이 시베리아, 극동에 걸친 지리, 인문, 자원 등 식민화를 위한 포괄적 업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대북방탐험”과 이를 주도한 독일인 뮐러의 업적과 연구결과는 유럽인 들의 도움을 받아 제정러시아의 실질적 영토를 태평양까지 넓히고 제국의 역사적 위상을 높였던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시베리아라는 공간에 대한 식민세력의 일방적 수탈 의도가 그 모든 활동과 연구의 저변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 결과 이 공간의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해당지역의 정체성 인식과 지역주의의 태동의 조건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4. 19세기 시베리아 지역주의의 태동 배경


19세기 들어 시베리아는 전체적으로 러시아의 통치권이 확립된 시기로 시베리아에 대한 담론들은 객관적 탐사나 연구의 대상으로서 전개되기보다는 지방행정단위로 지역개발과 사회변화와 같은 주관적인 사안에 맞춰져 갔다. 나아가 시베리아 출신 지성계에서는 중앙 러시아에 의한 개발과 착취의 대상적 관점을 거부하고 애향심과 분리주의 같은 새로운 담론을 제기하고 이 지역민들의 주체적 의식개혁에까지 나아갔다.

아나키스트로 널리 알려진 뾰뜨르 알렉세예비치. 끄로뽀뜨낀(П. А. Кропоткин)은 젊은 시절 근위학교를 마치고 아무르강의 코사크 기병연대를 자원하여 주로 이르꾸츠크에 주재하며 동시베리아 총독부에 근무하며 동시베리아와 극동지방을 여러 차례 지리학자로 탐사하였다. 그의 이 체험은 “주식 휘보Биржевые ведомости”와 같은 신문에 기고되고 훗날 그의 무정부주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시베리아에 대한 비교적 호의적인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신대륙”에서 러시아인들이 중앙 러시아 보다 훨씬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적인 사상을 견지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에 감명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도스또옙스끼와 유사하게 비참한 온갖 인간 군상과 아시아인들을 만나고 농민들의 풍속과 관습을 관찰하기도 하였다.22) 문명에서 벗어난 간단한 삶을 즐기기도 하고 중앙 정부의 간섭이 시베리아 농민에게 얼마나 무의미한 가를 역설하기도 한다. 그에게 시베리아는 결코 많은 러시아인이 생각하듯 추방된 자들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며 동토의 땅도 아니고 풍요로운 자연과 오히려 진보적인 러시아 인들이 다수가 있는 곳이다.

“시베리아 남부에는 캐나다의 남부만큼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경관도 빼어나다. 그곳에는 50만 명의 토착민들 외에도 4백만 명이 넘는 러시아인이 살고 있다. 서시베리아의 남부는 모스크바 북쪽의 여느 주처럼 완전히 러시아적인 땅이다.”23)

1860년대 당대 러시아의 유명한 학자이며 혁명가였던 끄로뽀뜨낀은 도스또옙스끼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이 땅에 대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러시아 식민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 그는 1862년 시베리아 행정당국이 러시아 본국의 어느 지방보다 진보적이며 모든 면에서 더 우수했었다고 상찬하였다. 즉 당시 “아무르 지방을 합병하였던” 동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 백작은 매우 지적이고 활동적이었으며 “조국을 위한 것이라면 무슨 일에도 몸을 던지는 사람”이었음을 평가하였다 끄로뽀뜨낀에 의하면 특히 그는 전제주의에 젖어 있으면서도 진보적 사상을 가지고 있어 민주공화정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끄로뽀뜨낀은 무라비요프가 시베리아를 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겨 온 옛 관리들을 쫓아내고 훌륭한 포부와 의욕을 갖고 있는 젊은 관리들을 등용하여 이들과 함께 집무실에서 “먼저 시베리아 합중국을 건설하고 나서 태평양 건너의 아메리카 합중국과 동맹을 맺을 것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관리들 중에는 추방된 바꾸닌도 끼어 있었다” 고 증언하였다.24)

끄로뽀뜨낀의 이 증언은 당대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의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즉 이후 1918년 시베리아의 분리 독립을 꿈꾸던 지식인 그룹은 이미 1860년대 시베리아에 포진한 이러한 행정당국과 신대륙 건설을 도모하던 진보적 반항아들의 전통을 이어 받았던 것이다.

사실 19세기 초까지도 알반 러시아인들에게 시베리아는 먼 곳으로 인식되고,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들이 지배하고 서구와 러시아 문화와 단절된 고립되고 후미진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시베리아는 일반 유럽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 제국의 경제, 정치, 문화적 내지(內地)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베리아의 지역사회에 대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시베리아 지역옹호자와 지역주의자들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고 러시아 제국 내에서 이들에 의한 이 지역의 정체성과 특수성에 대한 연구와 발언이 분출되었다.

1860년대의 대개혁으로부터 20세기 초의 혁명 시기까지 지역주의자들은 시베리아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하고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시베리아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하였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와 위상제고에 따라 시베리아를 유럽 러시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나아가 이전 300년간의 러시아제국 내에서의 식민지적 개념에서 벗어난 유럽러시아와의 동등한 자유와 권리 그리고 기회, 또는 시베리아 자체의 자결권에 대한 주장을 시작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시베리아 개발에 대한 유럽러시아와는 다른, 더 개방적이고 자치적 정책을 도모하였다.25)

물론 19세기 러시아는 이미 각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전통이 유지되던 상태가 강력한 짜르 정권에 의하여 하나의 대러시아 문화권으로 통합되어 갔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은 유럽화한 러시아가 겪는 분열과 개별화, 그리고 빈부의 격차 등 부정적 현상에 대한 대안으로 슬라브주의를 주장하고 시베리아에서 유지되어 온 전통적 러시아의 공동체 정신과 순수성에 치유력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지역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자치지역들이 연방형태로 통합되기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볼세비키 혁명이후 비러시아계 민족들은 레닌 정부에 의하여 잠시 자치권을 부여받고 시베리아도 1918년 중반에 자치정부를 선언하는 단계에 가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볼세비키 중앙집권주의에 흡수되고 말았다.26)

19세기 초, 제까브리스뜨의 최종 유형지이기도 하였던 이르꾸츠크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급속히 발전하여, “시베리아의 뻬쩨르부르그”로까지 불리워지게 되었다. 이 이르꾸츠크 출신의 몇몇 지역주의 작가들 중에는 .뽈례보이Николай Полевой, 깔라시니코프Иван Калашиников, .시츄킨Николай Щукин과 같이 결국 뻬쩨르부르그에서 머물면서 여생을 마친 이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특히 시베리아에 대한 긍정적, 나아가 유토피아적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뻬쩨르부르그는 음울하고, 삭막하고, 적대적인 지옥이었던 데 비해, 그들의 고향인 시베리아는 유쾌하고, 호감을 주며, 인심 후한 낙원으로 묘사되었다. 뻬쩨르부르그는 시베리아에 간섭 또는 이용만 하려는 가장 성가신 존재로 생각되기도 했다.27)

19세기 중반이후, 시베리아인의 지역사회에 대한 의식은 폭발적인 양상의 분리주의적 양상과 움직임 즉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으로까지 치달아갔다. 특히 뽈례보이, 깔라쉬니코프, 시츄킨이 이와 같은 움직임을 일깨운 것이다. 이들은 모두 <시베리아=천국>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다듬어 나간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베리아 애향자Сибирский патриот”로 파악될 수가 있으며 그들에 의해 시베리아의 이미지는 더욱 풍요로운 자유의 땅이고 유토피아로 부각되었다.

19세기 중엽 일군의 뻬쩨르부르그 대학內 시베리아 학생들과 급진적 지성들이 일종의 동향회를 만들며 시작된 초기 시베리아 지역주의자들은 그들의 고향 시베리아의 복지와 발전과 관련된 활동을 토론하고 연구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제까브리스뜨나 뻬뜨랴솁스끼 써클 등과의 접촉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당대 역사가 슬롭쪼프의 저술에도 영향을 받았다. 슬롭쪼프는 러시아 중앙정부의 시베리아에 대한 독재, 식민지적 정책에 항의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그것은 나중에 쉬차뽀프, 야드린쩨프, 뽀따닌같은 학자, 활동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모태가 되어 이른바 ‘시베리아 지역주의’(Сибирское Областничество)가 탄생된 것이다.28)




5. 정체성의 발견-“유토피아” 이미지


시베리아 지역주의의 정치적 표출은 여타 지역의 지역주의나 민족주의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오랜 세월간의 半식민지적 속박의 경험으로 인해, 다양한 정치적 표출양상을 보였는데, 이런 표출양상 중 어떤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도 있었다. 즉 시베리아가 “식민지적”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방안인 러시아로부터의 전적인 정치적 분리(독립)를 비롯하여, 제국 러시아의 테두리 안에서 시베리아지역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더 나아가서, 미합중국 연방헌법의 노선을 모범으로 한 연방형태의 러시아 속에서의 자치권을 획득하는 방안, 그리고 모국 러시아에 대한 정치/제도적 통합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런 다양한 대안이 제시된 데에는 시베리아라는 식민지는 여는 식민지와는 달리, 모국과의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러시아와 시베리아 내에서는 시베리아를 러시아의 “식민지로 보는 야드린쩨프의 견해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29)

제까브리스트의 유형지이자 풍부한 자연조건과 국제적 상업도시의 면모를 갖춰가던 이르꾸츠크는 당대의 시베리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시베리아의 정체성을 일깨워 가던 지식인들의 활동 중심지였다. 시베리아 최대의 상업 중심지인 이 도시는 자유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러시아의 어느 지역보다 자유로운 사상의 토론과 언론활동이 전개되었다. 시베리아의 다른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에 기반을 둔 향신귀족계층이 전혀 없었으며, 부유한 상인들과 함께 자수성가한 거부들이 귀족과 똑같은 권리나 특혜를 향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만큼 정치적인 자기주장도 강하여, 종종 이것이 제국정부의 관료집단과 노골적인 충돌양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30)

니꼴라이 뽈례보이는「모스크바 쩰레그라프 Московский телеграф」의 발행인이자, 「러시아 민족사 История русского народа」의 저자로서 러시아 주류문화 옹호자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5세의 나이에 시베리아를 떠나 평생을 외지에서 살았지만 그의 평생을 지배했던 도덕적, 지적 기풍과 특질이 이미 이르꾸츠크를 떠나던 당시에 이미 형성되고 계발되었다. 이후 뽈례보이의 시베리아에 관한 지식들은 모스크바나 뻬쩨르부르그에서 여생을 보내는 동안 습득되고, 그의 시베리아에 대한 열정은 시베리아에서 머물러 있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시베리아에서 떠나 있었을 때에 형성된 것이다. 비록 어린시절에 떠난 고향이지만 그는 시베리아에서 수도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찾을 수 없는 안전하고 청결하며 친근한 환경을 그의 유토피아 세계의 근거로 찾고 있다.

뽈례보이는 동시대의 이르꾸츠크 작가群에서 가장 “유토피아적”인 시베리아觀을 가진 사람이었다. 1830년작인 「큰사슴: 시베리아 전설 Сохатый: (Сибириское предание)」에서 그는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시베리아를 노래하고 있다.31) 이러한 그의 시베리아에 대한 향수병은 모스크바나 뻬쩨르부르그 등지의 삶에서 크게 낙망한 결과 시베리아를 정신적인 안식처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며 <모스크바 쩰레그라프>에서 더욱 시베리아를 변호하게 되었다. 그는 특히 일반 러시아인이 시베리아에 대해 무지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대하는 점을 들어 오히려 시베리아인들이 더욱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다고 반박하기도 하였다.32)

특히 시베리아를 미화하고 찬미하던 그는 그곳 상인계층에 대해서도 색다른 평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즉, 뽈례보이에게 있어서 시베리아의 상인은 가장 성실하고 안정된 계층으로,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유일한 합법적 상속인이기도 했다. 뽈례보이는 이러한 시베리아 상인들의 수완에 의해 러시아의 번영이 구가될 것이라 믿었다.33)

그는 시베리아를 러시아의 구세주로, 즉 시베리아가 러시아 각처에서 끌려온 온갖 범죄자로 우글거리는 소굴임에도 불구하고 그 광대한 지역에 그들 밑바닥 인생까지 포용하리란 확신을 표명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시베리아는 “그 많은 죄악들을 받아들이고 감출 수 있을 만큼 광대하니, 그대에게 임한 신의 섭리를 감사하라.” 시베리아 유형자들은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도스또옙스끼가 증언하고 있는 바와 똑같이 시베리아에서 “이곳(유럽러시아)에서 처음 들린 쇠고랑 소리의 긴 행렬도” 결국 광대한 시베리아 대지에서 의미를 잃고 자유의 영지에 임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뽈례보이에게 있어 시베리아는 늘 인간을 구속하고 태워버리는 듯한 모스크바나 뻬쩨르부르그의 “지옥”과 같은 이미지와 대비된다.34)

물론 이러한 뽈례보이의 유토피아적 시베리아관(觀)은 시베리아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지식이 제한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뽈례보이에게 있어 시베리아는 주로 정신적 개념에 의한 연구대상이었으며 시베리아 출신 작가들이나 그곳의 유형자들이 그들의 고향의 이미지를 일정한 안전거리 밖에서 추억에 잠겨 창조해 내듯이 뽈례보이도 마찬가지였다.35)

인식의 틀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장기간 시베리아에서 머물러 이곳을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대체로 이곳에 대한 그들의 인상이 다면적이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반 깔라쉬니꼬프는 모스크바나 뻬쩨르부르그에서 “지옥”을 경험할 만큼 오래 머물지를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지옥”을 그의 고향 이르꾸츠크에서 겪게 되고 시베리아의 “암울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깔라쉬니꼬프의 시베리아에 대한 열정자체는 뽈례보이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즉 그에게 그 “암울함”은 항상 시베리아 밖에서 온 무식하고 분별력없는 뻬쩨르부르그의 공직자들, 거칠고 호전적인 까자크인들, 지역을 감시하기 위해 모집된 전과자들 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점은 뽈례보이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악에 대항하여 끝내는 시베리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36)

깔라쉬니꼬프는 이르꾸츠크 김나지움에서 당시 제1 세대 시베리아 지역주의자중 한 사람이었던 뾰뜨르 슬로프쪼프에게 사사하였다. 졸업이후 이반은 이르꾸츠크 주재 지방정부에서 수년간 근무하였는데, 그의 재임기간이 당시 특별히 악명높은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I. 뻬스쩰(제까브리스뜨당의 한 인물인 뻬스쩰의 아버지)의 재임기간과 일치하였다. 뻬스쩰 총독의 재임기간(1806-1819)은 부패와 폭압으로 얼룩져 있었다. 깔라쉬니꼬프는 회고담에서 뻬스쩰의 치세는 이반뇌제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까지 토로하였다.37)

깔라쉬니꼬프는 시베리아를 이렇게 비극의 무대로 인식하고 시베리아의 상인계층에 대한 비전도 뽈례보이와는 달리 「상인 졸로보프의 딸(Дочь купца Золобова)」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비극의 희생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라시니꼬프는 시베리아의 상인계급이 러시아 국민성의 가장 우수한 자질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들에게 러시아의 미래를 의지해야 한다는 믿음을 표명하므로서 뽈례보이와 인식의 틀을 공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르꾸츠크가 기후나 식물군락, 천혜의 조건 등에서 적어도 뻬쩨르부르그보다도 나은 곳으로 인식하였다.

깔라쉬니꼬프의 시베리아觀은 뽈례보이의 그것과 본질적으론 유사하다. 뽈례보이의 경우와 같이, “지옥”으로서의 뻬쩨르부르그와 “천국”으로서의 시베리아가 대비를 이루고 있다. 즉, 깔라쉬니꼬프의 경우도 역시, 정작 시베리아를 떠나온 후, 러시아의 중심 도시들에 대한 실망과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오염되지 않은 무한한 대지의 생명력이 숨쉬는 시베리아를 찾고 문화와 인간의 참모습이 복원될 땅으로 간주한 것이다.

3인중 유일하게 시베리아에 실제로 머물면서 시베리아觀을 정립한 작가는 니꼴라이 시츄킨이다. 뽈례보이나 깔라쉬니꼬프처럼, 시츄킨도 결국 이르꾸츠크를 떠나서 뻬쩨르부르그에 정착한 사람이었지만, 시츄킨은 정부주관 사업시찰단에 끼여, 몇차례에 걸쳐 다시 시베리아 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그 경험을 토대 로 <모스크바 쩰레그라프>誌에 「레나강 편지」를 연이어 게재하고「야꾸츠크 여행기(Поездка в Якутск)」를 출간하였으며, 1840년에 또 다른 야꾸츠크 탐사여행 이후「여행기」의 증보판(增補版)을 1844년에 다시 출간하는 등 실제적 탐사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38)

시츄킨도 시베리아를 천국으로 신화화하며「이주민(посельщик)」에서 시베리아의 자연을 에덴동산에 비유하며 선이 악을 정복하고, 결백이 추함을 능가하는 등의 성경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여 시베리아의 정의를 옹호하였다. 여기서 뽈례보이, 깔라쉬니꼬프, 시츄킨 3인의 공통점은 시베리아에 선하고 진실한 기독교인이 존재하며, 그래서 시베리아 러시아인이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츄킨은 뽈례보이와는 달리, “시베리아를 오히려 아시아의 일부로 독립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시베리아는 아시아的 국가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독특하다.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라고 하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 행동영역, 기준, 정서에 의해서 행동한다. 따라서 유럽에서 먹혀들어가는 것들이 시베리아에서 전혀 먹혀들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베리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유럽的 행동범주와는 별개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39)

시베리아의 지정학적 의미를 간파한 시츄킨은 “아시아的”이란 표현으로 유럽的인 것과는 “다르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심지어는 유럽的인 것보다 더 좋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츄킨은 19세기초 이르꾸츠크 작가群에서 가장 反서구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이는 아시아 땅에 이룬 러시아의 식민지에 대한 그의 성실한 역사인식과 국제적 현실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시츄킨은 당대 환경을 고려하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여 또다른 선구적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견지한 시베리아 지역주의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대적 환경론자들의 범세계적 담론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환경에 대한 그의 의지는 1세기 후 20세기 발렌찐 라스뿌찐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21세기에 있어서도 19세기적 모범으로 숭앙되어 마땅하다.



6. 지역주의 이론과 운동


뽀따닌Г. Н. Потанин{1835-1920}과 야드린쩨프Н. М. Ядринцев{1842-1894) 등의 1860년대의 지역주의자들은 그들의 선배격인 뽈례보이, 깔라쉬니꼬프, 시츄킨 등 19세기 초 이르꾸츠크 작가들이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시베리아 신화에 힘입어 지역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40) 그러나 이들 신세대 지식인들은 시베리아를 진정으로 축복받고 순결한 환경 천국적 비전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들의 선배 이르꾸츠크 작가들의 결점을 보완하는 데에도 치중하였다.

즉, 신세대 지역주의자중 하나인 야드린쩨프는 시베리아 태생이 아닌 유형자들은 그들이 시베리아 생활을 얼마나 했던지 결코 시베리아의 진정한 아들일 수가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뽀따닌은 시베리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어린 시절 시베리아의 추억을 잃었다고 한탄만 하는 제2의 뽈례보이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제국의 “대도시”에 거주한 시베리아출신 작가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자신의 재능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경고하였다. 즉, 뽀따닌의 견해로는 한 사람의 재능은 그가 “유년시기를 보낸 바로 그 곳”에서만 계속해서 발전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이런 뽀따닌의 견해는 시추킨과 함께 약 10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농촌문학파 이르꾸츠크 작가 발렌찐 라스뿌찐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41)

뽀따닌과 야드린쩨프 두 사람과 함께 지역주의자들은 시베리아의 지역적-역사적 특징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팽창과 정착의 관점에서 북미대륙의 개척과의 유사성을 지적하여 미국의 발전모델을 거론하였다. 일부 지역주의자들은 시베리아를 영국령 캐나다와 호주 또는 신대륙과 유사한 개념으로 인식하여 미합중국 연방헌법을 참신한 모델로 인식하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이양 받을 절차를 연구한 듯하다. 그것은 크로포트킨의 증언에서도 알수 있듯이 시베리아 행정당국 내에서도 진지한 연구와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75년에 V. I. 바긴과 M. V. 자고스킨에 의하여 이르꾸츠크 최초의 지역주의 신문 “시베리아 Сибиръ”가 창간되어 지역문화의 선도 역할을 담당하는 듯하였으나 1887년 폐간되었다. 1880년대에는 야드린쩨프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지역주의 운동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고 1881년은 예르마크가 시베리아 칸 국을 정복한지 300주년이 되는 해로 다양한 기념행사가 치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야드린쩨프의 주저인 「식민지로서의 시베리아Сибиръ как колония 」가 출판 된 것이다. 야드린쩨프는 이 책에서 시베리아의 자기정체성과 자기인식 발전을 강조하여 향후 지역주의의 이론적 전거를 마련하였다. 이어 그는 주간지 「동방 리뷰Восточное обозрение」를 통해 중앙 러시아와 지방 행정당국의 위협에 맞서 시베리아의 입장을 대변하였다.42) 그는 특히 「식민지로서의 시베리아」를 통해 시베리아의 자연환경, 역사적 식민화 과정, 유형제도의 폐해, 원주민의 비참한 처지, 자원의 수탈 등을 고발하고 시베리아의 문명화된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제안으로 기초적인 경제, 농업, 교육개혁 방안까지 제시하였다.43)

1890년대 중반 야드린쩨프의 사망으로 시베리아 지역주의는 하강기를 겪는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로 유럽러시아로부터의 노동자 농민의 대거 유입으로 사회적 격변기를 맞는 한편 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유형에 의하여 지역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겪게 된다. 지역의 문제와 함께 계급의 갈등과 사회문제가 대두하고 있었다.

1900년대 러시아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시베리아의 도시와 지방의 생활상의 변화가 가속화되며 시베리아 지역주의도 순수한 애향심이나 지역특수성을 초월할 필요가 있었다. 1920년대에는 뽀따닌도 사망하고 지역주의 활성화 문제가 시험대에 오르고 1905년과 1920년의 혁명에 의해 촉진되었던 시베리아 자치권 획득을 위한 노력은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강력한 통합력에 의하여 시베리아라는 명칭 자체와 함께 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세기 시베리아 지역주의는 결코 민족주의의 파생물은 아니었지만 유사한 성격을 띄어 간 것도 사실이다. 지역주의를 주도한 인텔리겐치야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베리아인은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간주하였으며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그 문화를 즐겼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언과 관습을 갖고 시베리아인을 뜻하는 “씨비략Сибиряк”이라는 호칭으로 자신들만의 공통된 정서를 키워갔다. 이를 바탕으로 때로 그들은 시베리아의 일정한 독립성을 구가하는 행정제도 개선에도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지역애향심은 흔히 그 지역사회에 대한 정치적, 시민적 의무와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됨에 따라 점차 민족주의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는데, 시베리아 지역주의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즉 지역인의 고유한 정체성 고취와 역사와 세계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미래에 대한 인식의 독려를 통한 지역사회의 각성을 도모한 점이 그것이다.

와트로스(Stephen Watrous)에 의하면 “시베리아”라는 명칭자체도 시베리아 지역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이 명칭이 16세기의 따따르 칸 국에서 유래되어 1600년대 중반에 우랄산맥에서 태평양까지의 광대한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고, 이후 19세기 초에 스뻬란스키 통치 이후 이 시베리아 지역 전체의 단일행정체 명칭과 같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시베리아 최초의 향토사학자인 스뱌찌꼬프가 언급한 것처럼 “광대한 영토와 그 속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상이한 요소들이 이 이름(시베리아)하에 하나로 통일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1820-1880년대의 시기까지 이 지역이 행정적인 목적상 동/서 시베리아로 양분되기도 했지만, 시베리아라는 이름은 하나로 통합된 지역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전히 힘을 상실하지 않았다. 1880년대 이래, 제정러시아와 소비레트 중앙집권정부는 이 이름이 갖는 무형의 상징적인 힘을 경계하였다. 즉, 그들은 정부가 행정적인 차원에서 “시베리아”라는 용어를 쓸 경우에 이것이 우랄산맥 저편의 광대한 지역 내에 자치나, 이탈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조장할 소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44)

시베리아라는 명칭의 상징적인 의미의 위력과 함께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크로부터의 행정상의 원격성(遠隔性)도 지역의식을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17-18세기 시베리아는 <시베리아俯 Сибирский приказ>라는 “시베리아 전담 정부관할부서”에 의해 관장되었으며, 이후 19세기 초에는 <시베리아 위원회 >가 이를 대신하였다. 시베리아 현지 행정은 한사람 또는 몇 명의 총독-장군Генерал-гувернатор이 무제한의 전재 또는 독재권력을 행사하면서 전담하였다. 스뱌찌코프가 언급한 바처럼 이런 행정방식은 “이 지역주민들로 하여금 독특한 사고방식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이런 독특성은 지역주민들의 생활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45)

또 하나의 독특한 현상들은 -사실 이런 양상은 1870-80년대 유럽국가들이 “新”제국주의“로 새로운 팽창을 시도하기 이전 시기의 해외식민지에서 이미 볼 수 있는 사례들이었지만- 시베리아가 농업이주의 기회에 있어서 여타 어느 지역보다 개방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과, 원래 다수를 차지했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숫적으로 우세한 이주민에 의해 이내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국”의 이익을 위한 부존자원 수탈 등의 상황이었다. 이밖에도 농노제나 토지소유 귀족계급의 부재, 자유롭고 부유한 도시 상공시민계층의 번창, 유럽 러시아에서 보다 더 부유하고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농민들, 러시아적 문화전통으로부터의 구속이 전혀 없었다는 점등의 요인들도 시베리아를 유럽 러시아와 구별 짓는 특징들이었다.

시베리아 지역주의자들은 “식민지로서의” 시베리아가 미합중국 건국초기의 북미 13개주와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미 1830년대부터 미합중국 건국 사례가 시베리아의 탈식민화 계획에서도 적절한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제 뽀따닌은 1908년의 저술을 통해 두 국가간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매우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는 창조적인 러시아 혼(魂) 이 자유로이 나래를 펼 수 있고, 모국의 구태의연한 전통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고 전제하고, 이 때문에 시베리아는 북미대륙의 식민주(州)들과 비교되는 것이며 시베리아와 유럽 러시아와의 상호관계가 이 식민주들과 영국과의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뽀따닌에 의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인 영역에서만 그런 것일 뿐, 정치적 영역에서는 상이성을 발견하고 그것이 훨씬 더 크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시베리아와는 달리, 북미의 식민지 주민들은 모국에서 태동한 훌륭한 정치제도를 그대로 답습해 그들의 영토를 광대하게 팽창시킨 점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으나 북미의 식민주와는 달리, 시베리아는 대부분의 지역이 툰드라 기후대에 걸쳐 있기 때문에 척박한 땅이 훨씬 더 많은 점을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북미의 식민지 주민들이 모국인 영국에서 살 때와는 달리 개인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으며 시베리아의 주민들도 꽤나 개인주의적 성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다른 점은 러시아인의 정서상 개인주의는 그 이면에 잠재하는 집단주의의 성향으로 경도될 소지가 충분한 것으로 경고하였다. 즉 그에 의하면 베르자예프가 파악한 바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인들의 원천적 기질은 “예기치 못한 상황여건이 조성되기만 하면 이 개인주의자들이 얼마든지 다시 집단주의자들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46)

뽀따닌은 1894년 야드린쩨프의 사망이후, 시베리아 지역주의자중의 실질적인 진두지휘를 맡게되었다. 야드린쩨프의 사망뿐만 아니라, 이 무렵 시베리아 지역은 또다시 인구급증과 경제지리상의 변혁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지역주의의 노선도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와트로스에 의하면 1905년 혁명이후에, 뽀따닌은 “지역주의”나 “분리주의”등 용어들의 통상적 개념들을 재고(再考)하고, “분리주의도 국가의 안위에 해악이 되는 극렬한 행동만 삼간다면, 지역주의의 한 내용이 될 수가 있다. 분리주의 자체가 정책 당국자들에게 호감을 줄 수는 없겠지만, 지역주의의 한 지향으로 국가의 안정에는 아무런 위협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미 뽀따닌은 1865년경에 애향심과 분리주의를 혼동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 바가 있었으며, 야드린쩨프 사망(1894) 무렵까지도 이런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마침내 1905년에 와서는 <분리주의 = 일정한 정도의 지역자치>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으며, 이것은 시베리아 지역주의의 새로운 틀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제 시베리아 지역주의는 “문화, 경제, 정치적인 자급자족, 자치권 획득 등을 추구하는 향토애”를 의미하게 되었다.47)

러시아화 정책의 결과 19세기 말 이래 시베리아의 식민정책 추진은 대량 이주에 의한 러시아화 정책이 적극 추진되었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지선의 건설에 따라 시베리아에 러시아인의 증가는 급격히 신장하였고, 러시아인의 활동영역이 대폭적으로 확장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 시절의 러시아화 정책은 산업화 정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중앙정부의 체계적인 시베리아․극동지역의 개발에 연계되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종합적 지역개발이란 미명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부분 이 지역의 원유, 개스, 삼림등 천연자원을 개발하여 유럽러시아 지역의 중앙정부가 그 이익을 독점하고 말았던 것이다. 즉 지역의 희생을 통해 중앙의 발전을 도모하는 식민주의자적 발상에 머문 결과 지역의 환경파괴와 낙후를 간과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정체성(identity)을 논할 때, 항상 문제의 핵심에는 러시아가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또는 그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제기된다. 이 논의의 바탕에는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대륙에 걸치는 거대한 영토를 보유했고, 그 속에 바로 시베리아라는 객체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 대한 관점은 유럽적인 시각인가, 아시아적인 시각인가, 아니면 유라시아적인 시각인가에 따라 방향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이후 시베리아 지역주의자들의 담론에는 오히려 유라시아적인 정체성의 탐색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시베리아를 가능성에서 유토피아로 생각하는 그들의 자존심과 많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유럽문화의 일방적 세례 속에 성장한 인물들로 유럽러시아의 관점과 사고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는 없다.



7. 결 론- 시베리아 연구의 과제


16세기 후반부터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영토로 편입되기 시작하여 17, 18세기의 집중적인 탐사와 연구를 통해 개발의 근거를 마련하고 19세기까지 자원을 공급하는 식민지 역할을 하였다. 한편 정치범과 사상범의 유형지 역할을 하면서 ‘버려진 땅’ 또는 ‘저주받은 땅’으로 인식되다가 시베리아의 정체성을 자각한 지역 애향자 또는 지역주의자들에 의한 유토피아로서의 이미지가 부각되기도 하였다. 분명 시베리아의 러시아화 과정은 중앙정부의 주도에 의한 식민화 과정의 역사이고, 유형지로 불리워진 그 역할을 한 이 지역에 19세기 이래 지역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일정한 독립적 지역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즉 그들은 유럽문화의 결점을 극복할 대안으로 시베리아의 역할과 가능성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베리아 지역주의자들은 북아메리카의 독립국가인 미국을 모델로 자치 또는 독립국으로의 발전 방향까지 생각하기도 하였다.

시베리아 지역의 고유한 정신적,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가치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되어가고 있는지가 우리의 연구 대상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베리아-러시아 문학과 예술 속에 드러나고 있는 시베리아의 이미지는 18세기 이래 서구 문명에서 소외된 가난과 궁핍의 땅에서 대자연이 주는 자유와 환희의 유토피아로 변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순수한 자연과 인간성이 보존되고 정의와 자유가 살아 숨쉬는 이상향의 세계로까지 묘사되고, 유럽러시아의 도시세계 속에 오염된 인간 영혼을 정화시키는 공간이자 원초 러시아의 정신과 자유와 평등의 이상적 갈망을 실현할 공간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20세기에도 이어져 특히 1950년대부터 라스뿌찐 등 활발히 활동하던 일군의 시베리아 출신 작가들에 의하여 시베리아에 관한 작품들을 통해 현대 시베리아의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결국 시베리아의 정체성과 함께 문명과 원시성의 갈등, 시베리아 환경파괴와 개발의 잔혹성, 이로 인한 자연의 분노와 같은 첨예한 현대적 이슈들과 맞닿아 있다.

18, 19세기를 거쳐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연구는 이 지역의 식민화를 위한 러시아 정부의 줄기찬 탐사및 연구단의 파견과 그들의 조사보고서 수집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그것은 또한 유럽 각국에서의 적극적인 관심과 그들 유럽인의 도움에 기대어져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유럽의 이익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선도에 의하여 깜차트까까지 전체 시베리아가 유럽-러시아문화권에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시베리아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는 식민지 주민의 이용 가치를 탐색하기 위한 기초 자료적 성격이 지배적이기도 하였다.

특히 20세기 들어 시베리아의 역사, 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그리 많지 않고 주로 자원과 경제적 가치를 탐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기대어 이루어져 왔다. 시베리아 역사 부문에서 학술적 수준에서 주목할 성과로는 1960년대 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아카데미션 오끌라드니꼬프А.П.Окладников 박사가 편집주간이 되어 5권으로 출간한 「시베리아의 역사」가 가장 큰 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대에서 20세기까지의 시베리아 역사에 관한 최고의 종합적 서술로 알려진 연구물로 가치가 큰 성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60년대의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고 국가주의적, 일원론적 결론을 상정하고 서술되었음이 그 한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러시아의 전통적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관통되어 바탕으로 작용되어 시베리아 지역주의적 관점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시베리아는 유럽 러시아에 의하여 식민지로 간주되는 맥락이 지배하고, 시베리아의 자체 사회문화적 변화와 발전은 무시되고 있다.

「시베리아의 역사」는 방대하고 종합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유형지, 강제노동, 혹한, 광대한 공간과 인구 부족과 미개발로 인한 후진성과 같은 일반적 이미지의 표상에 의거한 관점 또한 지배적이다. 그것은 식민지와 그 본국의 관계와 같은 메카니즘 속에 모든 문화와 경제력이 중앙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그에 집중되어 있어 출판과 공연 그리고 방송까지 수도권적 시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20세기 현실의 근원이었기도 하다. 지역의 학자, 문화인조차 수도에 묶인, 그래서 지리적 이동에 의한, 결국 중앙의 시스템에 예속된 굴욕적 활동으로서만 인정받는 추세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시베리아 지역주의를 둘러싼 20세기 말 작금의 지적 논쟁은 러시아의 급격한 체제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후유증으로 인해, 특히 시베리아․극동지역 주민들의 생활환경이 급격히 악화된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시베리아․극동 지역주민의 유럽 러시아로의 이주가 가속화되면서 인구감소 현상이 나타나고, 중앙과 시베리아․극동 지역간의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가 심화되고 있다. 그 결과 최악의 경우 러시아연방의 해체로 귀결될 가능성까지 우려되고 있다. 몇몇 시베리아․극동 지역의 연방주체들이 실제로 주권 및 독립국가를 선언하고 있으며, 그 결과 시베리아․극동 지역의 ‘지역주의’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 지역주의는 물론 러시아연방으로부터 완전 독립보다는 연방으로부터 더 많은 지원과 지방정부의 경제적 자율권을 획득하려는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한다.

시베리아 정체성 연구는 이 지역이 갖는 지정․지경학적 가치에서 볼 때 러시아와 한반도 및 동북아의 공동 발전․번영을 위한 시금석을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 또한 21세기 미래 산업이 지향하고 있는 지속 가능하며 친환경․생태학적 개발이라는 관점에서도 인류미래와 관련된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기초하여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획일화, 폭력화되는 현대 서구 자본주의 문명의 대안이 필요한 시점에서, 고아시아적 평화와 공영의 이미지를 간직한 시베리아 원주민의 정신문화에 대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욱이 앞으로 시베리아 지역의 문화적 원형의 연구는 아시아계 원주민의 종교(샤머니즘)와 생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소수민족의 종교와 생활상 측면에서는 러시아인에게 완전히 동화, 통합되지는 않았다. 물론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통합은 완전히 이루어졌고, 특히 소비에트 시절을 거치면서 종교에 대한 탄압 가운데 러시아 정교도의 생활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시베리아인 고유의 샤머니즘 또한 붕괴되었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외경심에 바탕한 지역민들의 토착신앙은 생활의 척박함에 기대어 오히려 뿌리가 어느 정도 살아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원에서 러시아 영토 내의 특수한 현상으로 존재하는 시베리아의 종교와 생활상의 변화 모습을 연구한다는 것은 이 지역의 미래 정체성을 가늠하는 잣대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제 러시아․시베리아의 통합과정과 그 지적전통이 러시아 역사, 문화 속에 어떻게 구현되었고 어디를 지향했는가를 밝혀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21세기 러시아가 갈 길을 역사․문화적 토대 위에 밝혀볼 단계가 되었다. 이를 위해 시베리아를 화두로 러시아․시베리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담론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전통 주류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시베리아에 대한 폄하된 인식에 의한 식민화의 과정과, 그들의 일관된 지역통합 논지와 반대로 지역의 특수성과 이해관계에 대한 독자적 판단과 결정 폭을 넓히려는 시베리아 지역 지식인들의 일반 사상과 논지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주의의 개념을 밝히고, 그들의 이념과 사상의 합의와 반목의 원인을 조명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시도된 것이다. 또한 시베리아 개발과 보호 또는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의 상반된 입장의 배경과 원인을 점검하여 시베리아는 공익을 위한 일방적 개발이 아닌 인류미래와 관련된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제시해 보고자 시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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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한국-시베리아학보 제 4집 --

출처 : [기타] http://cafe.naver.com/northroo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45'

네이버 지식 boolingoo 2006.12.30 22:26


사진설명-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새해를 맞아 얼음 미끄럼틀을 찾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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